2010년 2월24일, 캐나다 밴쿠버 서부에 위치한 퍼시픽 콜로세움에서는 세계 피겨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역사적인 경기가 펼쳐졌다. 3년간 10차례 세계 신기록 경신, 부상 없는 최상의 몸 상태, 그해 시즌 내내 1위를 유지해온 선수의 경기였다. 그녀가 올림픽 챔피언이 될 거라는 데에 이견은 없었다. 유일한 염려는 라이벌이 바로 다음 순서로 경기에 나선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 선수는 코웃음을 한번 치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빙판 위에 올랐다. 스물한 살의 김연아였다.

마치 빙판을 누비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007 테마곡에 맞춰 활주하는 그녀의 스케이트 날에서는 얼음 지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각국의 해설진은 파란색 의상을 입고 거슈윈의 피아노협주곡 바장조를 온몸으로 연주하는 그녀에게 경탄했다. 영원히 공중에 떠 있을 것만 같은 점프, 손가락 하나 잘못 놀리지 않는 완벽한 연기, 스포츠를 예술로 격상시킨 경기, 밴쿠버의 김연아는 ‘퀸’이라 불리는 이유를 증명하며 총점 228.56을 받았다. 세계 여자 피겨 선수계가 처음으로 맞이한 200점대의 스케이터였다.

ⓒ이우일 그림
이후 행보는 더욱 위대했다. 김연아는 “나 때는 다 그랬어”라며 후배의 고통을 외면하는 세상의 수많은 선배들과 달랐다. 그녀는 자기가 겪어온 고통이 피나는 노력과 재능이라는 수사로 묵인할 수 없는 열악한 것이며 후배에게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주니어 시절 갈라진 스케이트 신발을 투명 테이프로 감아 신고 연습에 나선 일과 같은 어려움이 다음 선수에게 반복되어서는 안 되었다. 빙상장이 적은 환경 탓에 촉박한 시간에 쫓기며 경기장을 옮겨 다녀야 했고, 그마저도 영하 11℃에 맞춰진 얼음 온도(피겨의 경우 영하 4~5℃여야 한다)로 인해 필연적으로 부상의 위험을 안고 훈련해온 역사는 개선되어야 했다.

김연아는 피겨 꿈나무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한편 모든 어린이들의 복지를 위해 약 40억원에 이르는 기부를 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선수 전용 빙상장 건립을 제안하고, 태릉선수촌에 나가 피겨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개인적 욕심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집중된 여론이 척박한 국내 피겨스케이팅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퍼져나가길 바라며 예능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얼굴을 내비치기도 했다.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여전히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드리워진 가시덤불을 쳐내주는 위대한 선배로

밴쿠버 올림픽이 끝난 직후부터 은퇴설이 솔솔 나왔다. 정작 선수 본인은 1년8개월 동안 향후 진로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팬들은 그녀가 부담을 내려놓고 커피 광고의 한 장면처럼 부디 삶을 ‘낭비하길’ 원했다. 평생에 걸쳐 얻어낸 명성과 영광을 누리며 가끔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추며 건강하고 부유하게 살면 또 어떤가. 고된 훈련과 중압감을 더 이상 견디지 않아도 되길 바랐다. 김연아 이후의 피겨 선수가 없었다지만 주니어 유망주들이 자라고 있었다. 불모지에 홀연히 나타나 종목의 지평을 바꿔놓은 그녀에겐 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김연아는 선배로서, 언니로서 빙판에 돌아왔다. 팬들에게는 적잖이 속 시끄러운 복귀였다. 김연아는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하고 올림픽 출전 티켓을 3장이나 따내며 후배 두 명을 이끌고 소치로 향했다. 2014년 12월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가 펼쳐졌다. 그녀는 후배들이 세계무대라는 경험을 쌓는 데 밑거름이 되기 위해 이미 가본, 고되기 그지없는 길을 또 한번 걸었다.

2017년 2월25일, 최다빈 선수가 동계 아시안게임 여자 싱글 피겨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계 대회에서 들려온 7년 만의 우승 소식이었다. 최 선수가 어린 시절 김연아 장학금을 받았다는 사실도 화제가 되었다. 김연아는 최 선수에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니? 한국 난리 났어”라고 축하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무슨 일이긴, 이게 다 당신 덕에 일어난 일이지. 피겨스케이팅에 관심도 없던 나라에서 선수 전용 빙상장이 추진되고, 박소연·김나현·임은수·차준환·유영·최다빈 같은 유망주들의 이름을 줄줄 외는 모든 일이 한 사람에 의해 시작됐다. 7년 전 2월24일, 자신에게 주어진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어 여왕이 된 한 스케이터가 있었다. 지금도 김연아는 후배들에게 드리워진 가시덤불을 쳐내주는 위대한 선배로 그곳에 서 있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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