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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도 빨갱이”라던 태극단 노인

2017년 03월 13일(월) 제495호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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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 전 3·1절에 좌익과 우익이 갈려 기념식을 따로 치렀다. 그때의 ‘서북청년단’처럼 올해 3·1절에 서울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인 사람들의 눈에도 살기가 가득했다. ‘증오와 저주’의 그림자는 길었다.

지난 토요일 아빠는 촛불집회에 가기 위해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탔어. 우리 집 근처의 5호선을 타고 광화문역에 내리면 되는데, 2호선 시청역을 찾았던 건 촛불집회 참여에 앞서 ‘성조기 시위’를 구경하기 위해서였어(대개는 태극기 시위라고 부르는데 태극기를 존중하는 아빠는 그들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기 싫구나). 시청역으로 가면서 아빠는 일부러 초를 꺼내 들고 걸었다. 혹시 누가 시비라도 걸면 한바탕 야멸차게 대꾸해줄 생각이었거든. 그러나 시청 앞 서울광장에 올라서자마자 아빠 손의 초는 신속하게 호주머니에 들어가고 말았단다. 이유는 간단해. 무서웠기 때문이야.

‘계엄령 선포하라’는 구호는 기본, ‘빨갱이들 죽여라’는 손팻말이 지천이고 태반이 노인인 성조기 시위대들은 머리카락만큼이나 허옇게 흰자위들을 번득이고 있었어.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세상으로부터 타임머신 타고 온 듯한 노인들의 쉰 목소리에는 옛 노래들이 우렁차게 울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우야 잘 자라>였어. 그 노래가 태어나고 유행했을 때와는 수십 년 세월이 놓인 1970년생 아빠에게도 친숙한 노래.

ⓒ시사IN 신선영
3월1일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 모습.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한국전쟁이라는 난리통을 배경 삼아 나온 노래는 셀 수 없이 많다만 이 <전우야 잘 자라>는 꽤 잘 만들어진 노래라고 생각해. 북한의 전면 공격으로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던 한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피어린 혈투 끝에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마침내 잃었던 국토를 수복하고 서울을 되찾기까지의 과정, 그 와중에 죽어간 젊은 군인들에 대한 절절한 추모와 전쟁을 일으킨 이들에 대한 격렬한 분노가 생생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지.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라고 선언하기 전까지,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를 수없이 묻어야 했고,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모습이 꽃같이 별같이”라며 울먹여야 했던 이들에게 이 노래가 어떤 느낌이었겠니.

이 피를 토하는 듯한 노랫말을 지었던 이는 유호라는 분이야. 그런데 그에게 영감을 준 이름 모를 인물이 있었어. 전쟁 발발 당시 서울에 살던 유호씨는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된단다. 이미 인민군 탱크들이 한강변까지 내달리는 상황에서 유호 선생은 한 국군 병사를 목격하게 돼. “철모도 쓰지 않고 헝겊으로 만든 작업화에 총 한 자루만 갖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말이 아니었으나 눈빛만은 저주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돌계단 뒤로 몸을 숨기고는 인민군을 향해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 총에는 탄환이 떨어지고 없었다. 병사는 총을 내던지고는 효창공원 쪽을 향해서 뛰어갔다(<동아일보> 1992년 6월20일자).” 이미 적에게 함락된 도시에 남은 패잔병. 그러나 ‘저주와 분노’로 적을 겨냥하다가 빈총을 팽개치고 어디론가 달려간 무명의 국군 병사는 그 후 지금껏 전쟁을 경험했거나 전쟁의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들을 대변하는 노래의 원천으로 남게 되지.

ⓒ시사IN 자료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과 유품.
지난 토요일 아빠 앞에서 팔 휘적이며 이 군가를 부르던 노인들은 사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또래인 네 할아버지보다 연배가 훨씬 낮아 보였으니까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 같은 건 없었을 것 같고,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과 싸워보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나 그들은 이 노래를 참 열띠게도 부르더구나.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면서 아빠는 그런 생각을 했어. 꼭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이 아니더라도 저분들의 삶 자체가 전쟁이었겠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분들에게 가난과 굶주림이란 전쟁만큼의 공포였을 테고 전쟁처럼 잔인하게 사는 자와 죽는 자를 골라내는 각박한 세월 속에서 그들은 평생 전쟁의 포로로 지냈는지도 몰라. 동시에 전쟁을 일으켰던 북한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문신처럼 살에 새기고 철심처럼 뼈에 박아넣었겠지. 심지어 독재자에게 저항한 민주화 투쟁에서도 그 문신과 철심은 간간이 드러났다.

1960년 4월19일은 ‘피의 화요일’로 불린다. 부정선거에 항거한 시위대가 거세게 밀려들자 경찰은 실탄을 쏘았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갔지. 그때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울부짖음 반 노래 반의 <전우야 잘 자라>를 토해내며 총구 앞에 나섰다고 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적군이 아니라 경찰에 의해 쓰러진 친구들의 시신을 넘으면서 그들은 전쟁 때 노래를 불렀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그들은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그들의 외침 중 몇 개를 들어보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공산당도 싫고 이기붕도 싫다” 등등. 이 북한에 대한 본능적인 ‘증오와 저주’는 1980년 5월의 광주에서도 나타난다. 대한민국 육군 공수부대의 야수 같은 진압에 항거하고 나선 광주시민들도 항쟁 초기 “김일성은 오판 말라”를 부르짖고 있었단 말이지. 전쟁이 남긴 ‘증오와 저주’의 그림자는 그렇게 길었다.

‘증오와 저주’는 이제 역사의 무덤에 보내야

한국전쟁 때 일어난 비극 가운데 경기도 고양에서 일어난 금정굴 학살 사건이라는 게 있어. 전쟁 와중에 경찰과 태극단이라는 우익 단체가 공산당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학살하고 묻어버린 곳이 금정굴이었는데, 유해 발굴 결과 여자는 물론 아이들의 유골까지 발견됐지. 빨갱이라는 이유로, 철모르는 아이들까지 다 죽여버린 전쟁범죄였지만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태극단원을 비롯한 ‘우익’은 “전시 상황에서 즉결 처분이라는 것이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라고 우겼지. 아빠도 태극단이었다는 노인을 만난 적이 있어. 그때 그 노인 역시 허연 눈자위를 드러내며 소리 질렀지. “애들도 빨갱이였어!” 그 목소리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

전쟁이라는 게 무서운 이유는 전쟁에 참전해 총을 들고 싸운 군인들뿐 아니라 또 전쟁의 참화를 목격한 세대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까지 그 기억이 유전되고, 전쟁이 심은 증오와 저주가 상속되도록 만들기 때문이야. 그래서 전쟁의 상흔을 훌륭히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빵’과 민주화의 성취라는 ‘장미’를 모두 거머쥐었던 저 위대한 세대 일부의 가슴에 플라스틱처럼 썩지 않는 증오와 저주를 심어서 툭하면 미친 듯이 ‘빨갱이’ 물어뜯기에 나서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좋든 싫든 네가 아빠와 엄마의 모습과 행동을 닮아 있는 것처럼 결국 아빠 세대와 너희 세대 역시 네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역사적 DNA를 상속받게 돼. 하지만 아빠와 네 세대 역시 할아버지 세대의 역사적 자산을 이어받되 물려받지 말아야 할 악성 부채는 청산해야 할 의무가 있어. 특히 전쟁 때 새겨진 “원한이야 피에 맺힌” 증오와 “어린애도 빨갱이였다”는 이제 ‘잘 자라’고 다독여 역사의 무덤으로 보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3·1절 전야다. 꼭 70년 전의 3·1절. 1947년 3·1절은 우리 역사에 불길한 암운을 예고한 날이었어. 좌익과 우익이 갈려 3·1절 기념식을 치렀고, 좌우익 간 충돌로 서울·부산·제주 등 여러 곳에서 사상자가 났고, 그 이름도 끔찍한 ‘서북청년단’이 살기 어린 눈초리를 공식적으로 드러냈던 날이기 때문이야. 3년 뒤 전면전으로까지 이어지는 ‘증오와 저주’가 바야흐로 싹이 트고 줄기를 올렸던 슬픈 날인 셈이지. 2017년 3·1절은 제발 그 역사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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