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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잘 날 없었던 ‘박근혜 1475일’

2017년 03월 20일(월) 제496호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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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직 기간에 김용준·안대희·문창극 등 국무총리 후보자를 비롯해 많은 장관 후보자들이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했다. 이런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박근혜 정부는 안보 이슈를 일으켜 무마했다.

취임부터 파면까지 대통령 재직일은 1475일이다. 한국갤럽의 ‘국정 지지도’ 정기 조사에 따르면, 취임(2013년 2월25일) 즈음 국정 지지도는 42%였다(잘하고 있다 42%, 잘못하고 있다 22%). 이런 수치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2016년 12월9일 직전에는 국정 지지도가 5%로 추락했다.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91%에 이르렀다. 한국갤럽은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이후 ‘대통령 국정 지지도’를 묻지 않는다. 앞으로도 ‘박근혜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없다. 2017년 3월10일, 대통령은 파면되었다. 박근혜 정부 4년, 1475일을 되짚는다. 연대기로 쓴 ‘근혜 실록’이다(재직 기간 시점을 기준 삼아 호칭은 대통령으로 한다).

ⓒ시사IN 양한모
2013년:잇따른 인사 난맥 그리고 국정원


대통령 당선(2012년 12월19일) 직후인 당선자 시절, 1월 중순부터 인사 논란이 불거졌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문제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박근혜 당선자와 조율해 실시한 첫 인선이었다. 위장 전입, 세금 탈루 등 의혹이 줄줄이 이어졌다. 헌법을 다루는 수장 자리에 부적합하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결국 이동흡 후보자는 2013년 2월13일 사퇴했다(그리고 4년 뒤인 2017년 2월13일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을 앞두고 이동흡 변호사는 박 대통령 대리인단에 합류했다).

낙마한 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 인수위원장이기도 한 김용준 초대 총리 지명자,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 김학의 법무부 차관,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 등이 여러 의혹을 받다 줄줄이 사퇴했다. 2013년 5월에는 대통령 방미 순방 길에 동행했던 윤창중 대변인이 미국에서 일으킨 ‘성추행’ 사건으로 경질되었다.

김용준 총리 후보가 사퇴한 직후 박근혜 당선자는 인사청문회 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박 당선자는 인사청문회에 대해 “능력에 대한 검증보다는 너무 신상털기에 집중하는 것 아니냐. 새롭게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라고 말했다(2013년 1월31일). 노무현 정부 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제안해 인사청문회 대상이 국무위원으로 확대되었는데, 그때와는 무척 다른 태도였다.

집권 첫해, 대선 때 내세운 ‘경제민주화’는 뉴스에서 사라졌다. 2월21일 발표한 5대 국정 목표에서 ‘경제민주화’는 제외되었다. 대신 뉴스의 중심에 선 것은 국정원이었다. 원세훈 원장 시절의 ‘국정원 대선 개입’ 수사가 봄부터 본격화했다. 4월30일, 검찰이 국정원을 압수수색하기도 했다. 정치 개입에 관련한 수사가 벌어지는 가운데 2013년 6월 국정원은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고 나섰다. 새누리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해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뒤였다. 국정원이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면서 공작정치가 부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크게 일었다.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임명(8월5일), 국정원의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수사, 의원실 압수수색(8월28일), <조선일보>의 채동욱 검찰총장 관련 보도 이후 채 총장 사의 표명(9월13일) 등 사건이 이어졌다. ‘검찰총장 찍어내기’라는 말이 나왔다. 10월21일 국정원 대선 개입을 수사하던 윤석열 검사가 국감에 출석해 외압을 주장했고 나중에 그는 좌천되었다. 11월5일에는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의 주도로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안이 헌법재판소에 제출되었다. 12월에는 철도노조가 ‘철도민영화’를 반대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에 대통령은 ‘철도 파업은 명분 없는 일’이라고 했고, 이 발언 이후 공안몰이가 이어졌다. 계속되는 ‘공안정국’이 대자보의 시대를 열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묻는 대자보가 대학가에 확산된 겨울이었다.

ⓒ시사IN 양한모
2014년:4월16일, 그날, 세월호…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2월 신년 업무보고에서 ‘비정상의 정상화’를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 제도와 관행을 정상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달라” “작은 과제라도 비정상의 뿌리가 뽑힐 때까지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겨나갈 때까지 안 놓는 ‘진돗개 정신’으로 추진해야 한다.” 대통령이 업무보고 자리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4월16일 세월호 참사 때 대통령의 대응은 비정상적이었다. 대통령은 사고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서도 7시간이 경과할 때까지 집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 머물렀다. ‘대통령의 7시간’은 의문투성이였다. 대통령은 지나치게 무성의했고, 정부는 위기관리에서 철저하게 무능했다. 그 사이 304명을 태운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세월호 이후에도 박근혜 정부의 인사 참사는 이어졌다. 5월과 6월에 안대희 총리 내정자와 문창극 총리 내정자가 연이어 사퇴했다. 전관예우, 역사 인식 등이 문제였다. 두 총리 후보자가 낙마하자 세월호 참사 이후 사의를 표명했던 정홍원 총리가 유임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정홍원 총리가 유임되고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신설되었지만 ‘인사 파동’은 그치지 않았다. 7월에는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 정성근 문체부 장관 후보가 사퇴했다. ‘수첩 인사’의 실패가 이어지면서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도 나빠졌다. 문창극 총리 후보의 과거 발언이 알려져 논란이 확산될 즈음, ‘대통령이 잘못하고 있다’는 여론(47%)이 ‘잘하고 있다’는 의견(43%)을 넘어섰다.

11월 말에는 <세계일보>가 최순실씨의 전남편 정윤회씨가 국정을 농단했다는 ‘정윤회·십상시 문건’을 보도했다. ‘문고리 3인방’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비선 논란을 일축하고, ‘문건 유출, 국기 문란 일벌백계’로 사건의 프레임을 바꾸어버렸다(12월1일). 검찰은 문건 유출에 수사 초점을 두고 박관천 경정을 구속했다. 12월7일 박근혜 대통령은 ‘비선 실세 국정 개입’ 의혹을 반박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항상 비리를 척결하고 국민의 삶이 편안해지도록 끝까지 그런 생각으로 일해왔지만 앞으로도 그 생각밖에 없다.”

2015년:메르스, 국정화, 한·일 ‘위안부’ 합의

봄부터 뒤숭숭했다. 4월9일 해외 자원개발 비리와 관련해 수사를 받아온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완종 리스트’에는 여권 관계자 여덟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이로 인해 이완구 총리가 사임했다.

5월부터 두 달 동안 ‘메르스 사태’가 심각했다. 총 186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38명이 사망했다. 격리된 사람이 1만6693명에 이르고 메르스로 인한 국내총생산 손실액만 10조원으로 추정되었다. 컨트롤타워 부재로 사태의 혼란이 더 커졌다. 또다시 정부의 무능이 드러났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로 나아갔다. 8월5일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한국사 국정교과서 전환 가능성을 시사했다.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0월12일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했다. 이념과 관련한 논쟁은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를 낳았다. 메르스 사태가 한창이던 6월 중순 ‘잘못한다’는 여론(61%)이 ‘잘한다’는 여론(29%)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국정화를 발표하는 10월에는 둘 다 45% 내외로 수치가 비슷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 지지도가 빠지면 ‘북한 문제’를 언급하거나 이념적 사안으로 전선을 치는 패턴을 보였다. ‘국정화’가 그런 예다.

12월28일에는 느닷없이 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출연해 재단을 설립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불가역적이고 최종적인 합의’라고 못을 박기까지 했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시민사회의 반발이 그 후로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2016년:개성공단 중단과 사드, 최순실과 국회 탄핵 의결

2월10일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로켓 발사 실험에 대한 맞대응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2010년 5·24 제재조치를 취했고, 개성공단은 남북 간 경제교류의 유일한 창구였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124개 기업이 철수했다. 남북관계는 사실상 1970년대로 돌아갔다.

4차 핵실험 이후 ‘사드 배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방부는 7월에 ‘사드 배치 한·미 합의’를 발표하고 그 며칠 뒤에 경북 성주를 사드 배치 지역으로 정했다. 최근 사드 장비 일부가 한국에 반입되면서 논란이 더욱 커졌다.

9월부터 최순실,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의혹이 본격 불거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진경준·우병우 의혹이 일었던 7월부터 비선 의혹 등을 부인해왔다. “요즘 저도 무수한 비난과 저항을 받고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불안해진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비난에도 굴하지 않아야 하는 것”(7월21일),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9월22일), “도가 지나치게 인신공격성 논란이 계속 이어진다면 기업들의 순수한 참여 의지에 찬물을 끼얹을 것”(10월20일).

10월24일에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 개헌 추진’을 꺼내기도 했다. 2014년 10월에 내놓았던 ‘개헌 논의 반대’를 뒤집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JTBC에서 ‘최순실 태블릿 PC’를 보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붕괴의 시작이었다. 국정 지지도가 급전직하했다. 11월 초 이후 박근혜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4~5%였다. 검찰 조사, 특검 조사를 받겠다고 했으나 말뿐이었다. 결국 2016년 12월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92일 뒤인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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