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자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렸다. 1997년 12월15일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사무실. 전날 밤 방송된 텔레비전 찬조 연설을 재방영해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예상 밖의 흥행이었다.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며, 직접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이어졌다. 화면에 등장한 인물은 나흘 전 입당한 ‘초보 정치인 박근혜’였다(당시 찬조 연설 화면에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장녀’라고 소개되었다). ‘박정희 향수’라는 정치적 유산을 가진 그녀의 등장에 정치권이 술렁거렸다. 입당 원서를 쓰는 자리에서 그녀는 정치 입문의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비참하고 가난한 나라를 어떻게 일으켰는데, (IMF 사태로) 이 지경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분노심, 안타까움이 들었다.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게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도리가 되는 것 같다.” 외환위기라는 국란(國亂)이 정치의 계기를 열었고, 20년 후 그녀는 또 다른 국란(國亂)의 주범이 되어 정치권을 떠난다.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 찬조 연설.

비록 이회창 당시 후보는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정치 초년생 박근혜’에게는 기회가 일찍 찾아왔다. 1998년 4월, 대구시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근혜 후보는 만만찮은 상대로 꼽히던 엄삼탁 후보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당시 선거에서 그는 유권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깨끗하고 바른 정치, 아픔을 같이하는 정치가 구현되도록 하겠다.” 뒤이은 2000년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하고 단숨에 한나라당 부총재에 오르며 당내 입지를 굳힌다.

통상적인 정치인의 궤적은 아니었다. 정치 입문 4년 만에, 박근혜 부총재는 제16대 대선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정치로 이끌어준 당내 1인자 이회창 총재와도 각을 세웠다. 국민참여경선 도입, 당권과 대권 분리, 영남 후보 필요성을 주장하며 당내 존재감을 높였다. 나이, 당선 횟수, 정치 경력은 부족했지만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대중적 인기가 강점이었다.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 찬조 연설을 시작으로 정치에 데뷔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보수 세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전면에 나서 선거 승리를 이끌었고, 마침내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한나라당에서 활로를 찾지 못한 박근혜 부총재는 2002년 2월28일 탈당을 선택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다.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난 것(2002년 5월)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신생 정당의 한계는 금세 드러났고, 대선 직전인 2002년 11월 다시 한나라당으로 복당해 이회창 후보 선대위 의장을 맡는다.

이회창 후보는 두 번째 대선에서 재차 무릎을 꿇는다. 포스트 이회창이 부재한 상황. 한나라당 역시 리더십 문제에 직면한다. 검찰의 ‘차떼기(대기업한테 현금이 든 트럭을 통째로 전달받는 불법 정치자금 수수)’ 수사(2003년 말),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2004년 3월)으로 최병렬 대표 체제가 흔들렸다. 2004년 4월로 예정된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당장 총선에서 80석도 못 건지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당 주류는 물론 당내 소장파 의원들도 구원투수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박근혜 당 대표 카드’였다. 여기에 상징적인 이벤트를 하나 더했다. 당 현판을 떼어내고 ‘천막당사’가 펼쳐졌다. 거대 여당의 출현을 막아달라는 호소가 통하면서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어 참패를 면했다.

경험과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가라앉았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박근혜 체제’는 안정적으로 가동됐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2004년 6월5일 재보선, 2005년 4월30일 재보선, 2005년 10월26일 재보선, 2006년 5월31일 지방선거까지 한나라당은 내리 승리를 거뒀다. 원조 친박의 시대였다. 초선 유승민 의원이 당 대표 비서실장을, 3선 김무성 의원이 당 사무총장을 맡아 ‘박의 복심’으로 분류됐다. 때마침 노무현 대통령의 레임덕은 일찍 찾아왔다. 차기 대권 주자 1순위에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대선 경선을 앞두고 당내에도 ‘친박’이 세를 규합했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

 

구원투수로 등판해 ‘선거의 여왕’ 되다
 

유일한 적수는 당내에 있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은 ‘사실상의 결승’으로 불렸다. 당시 여당은 분열했고, 대통령의 인기는 하락세였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은 전쟁과 같았다. 이 승부에서 이기는 쪽이 정권을 가져갈 확률이 높았다. 김무성·최경환·유승민·유정복·이혜훈 등 친박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박근혜 후보의 경선을 준비했다. 최태민 의혹도 경선 과정에서 불거졌다. 상호 비방전이 이어졌다. 박근혜 캠프는 이명박 후보의 약점인 도곡동 땅 문제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당이 두 갈래로 나뉘어 폭로전을 거듭했다. 결과는 이명박 후보의 승리였다.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집권 보수 정당에서는 이때부터 양대 계파의 갈등이 늘 당내 이슈로 떠올랐다.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는 친이계가 친박계를 내쳤다. 박근혜 경선 캠프에서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았던 김무성 의원을 비롯해 서청원·홍사덕·이규택 등 친박 핵심으로 꼽히던 인사들이 줄줄이 공천을 받지 못했다. 박근혜 당시 의원은 2008년 3월23일 기자회견에서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라는 말을 남겼다. 공천에 반발한 친박계 인사들은 탈당한 뒤 ‘친박연대’와 ‘친박무소속연대’로 나뉘어 선거를 치렀다. 그중 일부는 배지를 달고 생환에 성공했다.

이명박(MB) 후보와의 대결 이후 친박계는 당권과 위세를 잃었다. 그러나 거물급 정치인 박근혜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친박계의 협조가 없다면, MB 정부가 추진하는 주요 현안도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 9월1일 세종시 수정안 본회의 표결이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정운찬 총리에게 힘을 실으며 세종시 수정안을 밀어붙이려 했다. 하지만 충청권을 중심으로 ‘박근혜 대망론’을 밀어붙이려던 친박계가 제동을 걸었다. 결국 야당과 친박계를 중심으로 본회의에서 반대표가 모였고, 대통령이 밀어붙인 정책(세종시 수정안)과 차기 정치 지도자(정운찬 총리) 구상은 무너지고 말았다. 집권 3년차, 한나라당 권력 지형의 균형추는 점차 차기 유력 주자인 박근혜 의원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2010년 8월21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의원 간의 회동이 성사되었다. 양측의 합의 사항은 간명했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협력한다.” 사실상 현직 대통령이 후임으로 박근혜 의원에게 힘을 실어준 순간이었다.

2011년 홍준표 체제로 유지되던 한나라당은 선관위 디도스 공격이라는 또 한 차례 위기에 직면한다. ‘천막당사’급으로 당이 환골탈태하지 않는 한, 다가오는 2012년 총선에서 참패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홍준표 체제는 차기 유력 대권 주자인 박근혜 체제로 전환되었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을 버리고 ‘새누리당’이라는 간판을 새로 달았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거둔 의석은 과반을 넘긴 152석. 15년 전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한 정치인 박근혜는 거대 여당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연합뉴스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2017.3.21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대단히 압축적이고 극적이었다. 정치 경력 20년 가운데, 16년을 특정 세력의 리더로 활동했다. 그녀가 특정 세력을 대표하는 동안 집권 보수 정당은 세 차례(제18·19·20대 총선) 공천 파동을 겪었다. 그리고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으로 보수는 위기에 내몰렸다. 그녀의 20년 정치 인생이 끝나고 한국 보수 정당에게는 ‘비극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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