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왼쪽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변호인은 의뢰인과 애써 거리를 두었다

2017년 03월 29일(수) 제497호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webmaster@sisain.co.kr
공유하기

구글+구글+ 카카오톡카카오톡 카스카스 라인라인 밴드밴드 네이버블로그블로그 URL복사URL복사

URL 복사

아래의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 의뢰인의 주장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고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변호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변호사는 그 주장을 법정에서
밝혀야 할까? 이런 일은 흔하지 않지만 일어나기도 한다.

사람들이 늘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비록 자기 사건을 처리하는 변호사라 하더라도 그렇다. 적극적으로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더하여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실을 덜 이야기함으로써 진실을 숨기기도 한다. 여기서 변호사가 하는 일은 자기 의뢰인이 ‘주장하는 사실’ 중에서 법적으로 의미 있는 것을 골라내어 유리한 지점을 강조하고 방어 논리가 구축될 수 있도록 배치하는 것이다. 의뢰인의 주장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법정에서 제시할 순 없다. 이는 변호사의 직업윤리에도 어긋난다. 다만 주장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고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이를 변호사가 법정에서 명시적으로 밝힐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적어도 이런 일은 흔하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2016년 3월21일 영국 글래스고 인근 도시 클라이드뱅크 근교의 잡목 숲을 지나가던 행인이 덤불 아래 검은색 쓰레기봉투에서 사람의 발 같은 것이 삐져나온 걸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쓰레기봉투에 담긴 것은 15세 소녀 페이지 도허티였다. 최소 146군데나 칼로 인한 상처를 입은 채였다. 시신을 조사한 결과 범인이 명백하게 의도를 가지고 찌른 것이 61차례로 밝혀졌다. 이 중 43차례 공격은 머리와 목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마 절반이 멍들어 있었고, 코는 부러졌으며, 눈을 가로질러 벤 상처가 있었다. 칼로 반복해 찔러대는 바람에 몸에는 어른 주먹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나머지 상처들은 주로 공격을 막아보려다가 입은 것으로 추정됐다. 도허티의 키는 146㎝였고 몸무게는 38㎏ 정도에 불과했다.

ⓒPA Wire
2016년 10월12일 피해자 페이지 도허티의 어머니 패멀라 먼로(가운데)가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소녀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미용실에 나타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아 가족이 실종신고를 낸 지 이틀 만이었다. 소녀는 사흘 전 금요일 밤 단짝 친구의 집에서 자고 이튿날인 3월19일 토요일 아침 아르바이트를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딜리셔스 델리’라는 이름의 샌드위치 가게에 아침으로 먹을 소시지롤을 사러 들어간 것이 소녀가 목격된 마지막이었다. 소녀는 살아서 가게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당연히 가장 강력한 용의자는 딜리셔스 델리의 주인 존 리뎀이었다. 도허티의 어머니가 직원을 통해서 소녀의 행방에 대해 물었을 때 리뎀은 소녀를 모른다고 했다. 리뎀은 후일 자신의 가게나 차에서 핏자국 등 소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경찰에 말했다. 그러나 핏자국은 시체가 발견된 현장뿐 아니라 리뎀과 관련된 여러 장소에서 확인됐다. 그가 핏자국을 지우려 한 흔적 역시 찾을 수 있었다. 결정적인 증거는 CCTV 영상이었다.

가게와 그 주변에 설치된 CCTV 영상에 따르면, 소녀는 사건 당일 아침 8시21분 리뎀의 가게로 들어간다. 소녀가 가게로 들어선 지 10분가량 되었을 때 가게 앞 셔터가 내려진다. 가게를 나온 리뎀이 차를 끌고 와서 세운 후 대형 쓰레기봉투와 청소용 물티슈를 사온다. 잠시 후 그는 검은색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와서 차에 싣는다. 봉투 사이로 소녀의 하얀 양말을 신은 발이 삐져나와 있지만 행인들은 무심히 주변을 지나간다. 그는 쓰레기봉투를 차 트렁크에 던져넣고는 표백제를 한 통 사서 가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리뎀은 평시와 똑같이 영업을 한다.

ⓒPA Wire
2016년 3월26일 존 리뎀(가운데)이 법원에 출두하고 있다.
리뎀은 도허티의 시신을 멀지 않은 자기 집 마당 창고에 옮겨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녀를 죽인 다음 날인 일요일, 그는 가족을 데리고 근처의 관광지로 놀러갔다. 소녀의 가족이 실종신고를 했고 수색이 시작됐다. 월요일 아침 6시쯤 리뎀은 출근길에 소녀의 시체를 잡목 숲 덤불에 버렸다. 리뎀은 시체가 발견되고 사흘이 지나서 체포됐다.

범인의 최소 수감 형기는 23년


이 과도할 정도로 끔찍한 범죄에 지역 주민들은 경악했다. 문을 닫은 가게의 셔터에는 스프레이로 욕설이 그려졌고, 사람들이 집에 달걀을 던지는 바람에 리뎀의 가족은 집을 떠나야 했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은 이런 범죄가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는 매우 드문 것이며, 특히 소녀 앞에 펼쳐져 있던 인생을 잔인하게 끝내버린 범인이 그저 평범한 시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 크다고 밝혔다.

리뎀은 살인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유죄를 인정했을 때 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은 그를 향해 괴물이라거나 변태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만 사건의 원인과 관련해 리뎀의 변호사는 도허티가 먼저 그를 성범죄자로 몰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리뎀은 ‘평범한 시민’이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둘 있는 32세 가장이었고 가게 운영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정신적 문제도, 전과도 없었다. 리뎀에게는 성범죄자 리스트에 등록된 쌍둥이 형이 있었다. 성범죄자로 등록되는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았던 리뎀이 소녀의 협박에 ‘지나치게 과잉반응을 했을 뿐’이라는 얘기였다.

리뎀이 주장한 ‘사실’에 따라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 사건 당일 도허티는 리뎀의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하는 문제를 상의하러 왔다. 둘은 가게 뒤쪽 사무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고, 도허티가 겨우 15세라는 것을 알게 된 리뎀이 소녀의 엄마와 먼저 상의해봐야 하며 일자리를 원하는 다른 후보 역시 면접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도허티는 리뎀이 일자리를 줄 줄 알았다며 그러지 않으면 그가 자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분노한 리뎀이 벌떡 일어나자 소녀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그는 선반에 놓여 있던 칼을 집어 소녀를 반복해서 찔렀다.

흥미로운 것은 리뎀의 변호사가 위와 같이 주장하면서도 자신은 소녀가 한 말 때문에 칼로 찌른 횟수나 공격의 잔혹성이 정당화된다고 말할 입장은 아니라고 굳이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는 더 나아가 범인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본인도 알 수 없다고 못 박고, 자신은 다만 리뎀이 주장하는 대로 사건의 경위를 밝히는 것이라고 애써 의뢰인과 거리를 두었다.

재판 결과 리뎀은 최소 27년을 복역하면 석방될 수 있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판사는 피해자로부터 협박받았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피고인의 주장에 불과했다. 더 나아가 만일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성범죄자로 몰겠다는 협박 때문에 이 끔찍하고 사악한 범죄의 본질이 완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이 사건에서 본질적인 것은 성인 남자가 방어할 수단이 없는 아동을 미친 듯 공격해 잔인하게 죽였다는 사실이지 소녀의 협박이 아니다.

원심 선고는 지난해 10월에 있었고 리뎀은 같은 달 항소했다. 항소심에서 리뎀의 변호사는 범인이 초범이라는 점, 살인이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 그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는 점, 시체를 숨긴 것이 아니라 발견되기 쉬운 장소에 유기한 것뿐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또한 유사한 아동 살인 범죄와 비교해봤을 때 원심의 형기는 양형 관행상 부당하게 길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재판에서 매우 통상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변호사가 위 주장을 모두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런 주장이 원심에서 제기되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항소심 선고에서 그의 최소 수감 형기는 23년으로 축소됐다. 지난 2월의 일이다. 항소심의 변호사는 원심과 같은 사람이다.

전체선택후 복사하여 주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