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의사 장준혁을 실제로 만났다면 참 정이 가지 않았을 것 같다.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장준혁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나쁜 놈’이다. 외과 과장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상대 후보를 찾아가 무릎을 꿇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부주의로 환자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유가족에게 무릎은커녕 “외과 수장으로서 도의적인 책임만은 느끼고 있다”라는 ‘기름장어’ 같은 말로 책임을 회피한다.

자세히 보면 이거 정말 ‘망할 놈’이 따로 없다. “그래도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뻔한 말로 역성을 들어주고 싶지만 인간적으로도 별로 좋은 구석이 없다. 유가족에게서 소송을 당하자 부하 직원들에게 진료 기록을 조작하고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도록 압박한다. 죽마고우인 최도영 내과 교수는 장준혁 때문에 결국 병원에서 쫓겨난다. 심지어 장준혁은 아내 몰래 만나는 여자까지 있다.

ⓒ이우일 그림
이 ‘망할 놈’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가 암 선고를 받고 점점 쇠약해져가는 대목에서는 같이 눈물을 흘리게 된다. 나도 모르게 “망할 놈아! 망하지 마!”를 외치게 된다. 장준혁이 자신을 갉아먹어 가면서까지 성공에 집착하는 괴물이 되는 과정을, 쉽사리 외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밥 한 그릇을 두고 홀어머니와 서로 양보할 정도로 지독한 가난 속에서 어린 준혁이 믿어야 할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쉬지 않고 놓지 말고 끝까지 붙어”서 의사가 됐다. 대학병원이라는 사회의 축소판을 마주한 장준혁이 무엇을 먼저 배웠을지 우리는 잘 안다. 이 사회는 결코 실력순으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에게는 어디에서도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는다.

현실의 우리는 장준혁만큼 천재적인 실력을 갖추지도 않았다. 주인공 장준혁보다도 병원 측에 유리한 진술을 강요받는 단역 ‘직원 1’ 정도의 삶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장준혁의 “내 밥 내가 찾아먹겠다는데 뭐가 추해?” “들여다보면 너나 나나 죽을힘 다해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건 똑같아”라는 말이 더 아프게 박힌다. 한 번만 눈 딱 감으면 미래가 보장되는 상황에서 과연 나라면 쉽게 조직에 맞설 수 있을까?

“쉬지 않고 놓지 말고 끝까지 붙어”서 의사가 된 흙수저

이전 의학 드라마가 생명의 숭고함이나 병원에서 싹트는 사랑이 중심이었다면, 〈하얀 거탑〉은 정치 드라마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병원 안의 권력 다툼을 적나라하게 해부했다. 저 여의도나 청와대에서 오가는 것만이 권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권력이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만들고, 하기 싫은 것을 못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던가. 장준혁과 주변 인물들이 체스 게임처럼 어떻게 사람을 움직여서 권력을 끌어오는지가 이 드라마의 척추다. 돈·인맥·체면이 뒤얽힌 이 판에서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그렇기에 기존 드라마의 도식적인 선악 대결구도 안에 장준혁을 대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한 번도 져본 적 없던 장준혁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손으로 수백 번 고쳐낸 바로 그 병, 담관암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고 말았다. 〈하얀 거탑〉 팬들은 드라마 마지막 회 방영일인 2007년 3월11일을 장준혁의 기일로 여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9일이 되던 그해 4월29일에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장준혁 49재’가 오르기도 했다. 유서 옆에 의료소송 상고이유서를 써놓았을 정도로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나쁜 놈’치고는 꽤 과분한 사랑을 받은 셈이다(사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장준혁다운 마무리였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왜 이 ‘나쁜 놈’을 쉽사리 잊지 못했을까. 그건 아마도 자신을 배신했던 제자 염동일이 문병을 오자, 죽음을 앞둔 장준혁이 건넨 말과 같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싶다. “미운 놈이라도 가끔은 보고 싶을 때가 있더라.” 밉지만 보고 싶은, 장준혁의 10주기를 추모한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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