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 162분.’ 보도자료에 새겨진 숫자를 확인하고 후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 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이 지루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액션이나 SF 장르도 아닌 고작 드라마 장르의 162분을 졸지 않고 견디기란 또 얼마나 버거운가.
‘졸지만 말자’고 다짐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울지만 말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결국 울게 되더라도 ‘소리 내어 울지만 말자’며 스스로 다독이고 있었다. “이전에 만난 적 없는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타임〉),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밌고 놀랍도록 감동적”(〈할리우드 리포터〉), “아주 단순하면서도 아주 독특하고 아주 현명한 작품”(〈플레이리스트〉) 등등 해외 평단의 경쟁적인 호평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웃다가 눈물짓고 다시 웃다가 훌쩍이고 나니 어느새 다 지나간 2시간42분.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고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독일 영화 〈토니 에드만〉의 얘기는 이렇다.
오늘도 어설픈 1인2역 연기로 문밖에 선 택배기사를 놀려먹는 주인공 빈프리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를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도 실없는 농담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놓지 못하고 온갖 회의와 협상에 시달리는 직장 여성 이네스에겐 아빠의 농담 따위 받아줄 여유가 없다. “인생을 즐기고 있는 거니?” 사뭇 걱정스럽게 묻는 아빠가 너무 태평해 보여 짜증 날 지경이다.
잠깐 아빠 얼굴 보고 다시 바쁘게 해외출장을 떠난 딸. 연락도 없이 불쑥 딸 앞에 나타난 아빠. 반가운 척했지만 반갑지만은 않았다. 불편한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티가 나고 말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잘 지내보고 싶었지만 결국 잘 지내지 못했다. 쫓겨나듯 집으로 돌아가는 아빠를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며 이네스가 운다. 울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이네스를 보며 관객이 운다.
그 뒤엔 다시 코미디. 떠난 줄 알았던 아빠가 엉성한 변장을 하고서 딸 주변을 맴도는 이야기. 그러다 문득 또 눈물 고이는 장면 하나. 아빠가 아닌 척하는 아빠 품에 얼굴을 묻고 좀처럼 포옹을 풀지 못하는 딸. 하지만 곧 또다시 웃음. 그러다가 다시 또 눈물. 그러고는 또다시….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서운하면서 미안하고, 살가우면서 어색하며, 안쓰럽지만 밉살맞은, 그러니까 세상 모든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느끼는 그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을, 어떻게 이 한 편의 영화에 모두 담아낸 걸까? 마렌 아데 감독의 인터뷰에 힌트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언제나 작별로 가득하다. 아이에게 새로운 일이 시작되면 부모에게는 무언가가 끝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아들은 키 1㎝가 클 때마다 신나지만 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래서 영화에 일련의 작별을 포함시키기로 했다. 빈프리트는 인사 한번 없이 딸과 여러 번의 작별을 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포옹도 그러한 작별 인사를 하려는 시도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작별로 가득하다
가짜 치아를 끼운 아빠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자지러지게 웃던 어린 딸은 이제 없다. 어른이 되면서 웃음을 잃어버린 딸에게 다시 웃음을 돌려주려고 애쓰는 늙은 아빠는 곧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미’ 찾아온 작별과 ‘아직’ 찾아오지 않은 작별 사이에 지금 두 사람이 있다.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아서 어색해진 아빠와 딸이 잠시나마 예전 같은 시간으로 돌아가 힘껏 끌어안는 순간.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와 커다란 털북숭이 가면이 만들어낸 마법 같은 작별의 시간. 영화 〈토니 에드만〉의 품에 안긴 관객들에겐 이 봄이 더욱 봄다울 것이다. 마음이 제법 포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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