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밧테네(힘내요)!”

규슈올레 중 열여덟 번째로 이즈미 코스가 개장하던 지난 2월18일. 출발점인 이쓰쿠시마 신사를 지나 마을길로 접어들자 팔순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일본 할머니가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이렇게 인사를 건넸다. 이튿날 열아홉 번째로 개장한 미야마·기요미즈야마 코스에서도 마찬가지. 밭일을 하다 말고 올레꾼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주민들이 눈에 띄었다. 개중에는 한글로 삐뚤빼뚤 쓰인 손팻말을 들고 올레꾼을 환영해주는 이도 있었다.

제주올레와 규슈올레가 겹경사를 맞았다. 올해로 제주올레가 개장 10주년, 규슈올레가 5주년을 맞은 것이다. 언론인 출신인 서명숙씨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제주올레는 지난 10년 사이 국내에 도보여행 붐을 일으키며 ‘걷는 길’의 대명사로 통하게 됐다. 2007년 1코스(시흥~광치기)를 선보이며 시작된 제주올레는 현재 26개 코스 425.3㎞에 이른다.

ⓒ김진석규슈올레 19코스 개장식에서 올레꾼을 환영하는 미야마 시 주민들.

규슈올레는 일본의 남단 섬 규슈에 만들어진 트레킹 코스 이름이다. 한국의 제주올레로부터 ‘올레’ 브랜드를 직수입했다. 2012년 2월 사가 현 다케오 코스를 시작으로 매년 2~4개씩 걷는 길을 늘려간 결과 5년 만인 2017년 2월 말 현재 19개 코스 222.5㎞를 개장했다.

제주 해안가를 따라 중단 없이 이어진 제주올레와 달리 규슈올레는 듬성듬성 끊겨 있다. 규슈의 면적(4만4436㎢) 자체가 남한의 절반에 이를 정도로 광대하다 보니 이를 잇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탓이다. 그러나 한두 개 현(縣)에만 올레길이 있던 5년 전과 달리 지금은 규슈 내 7개 현에 올레길이 고루 분포하게 된 것만도 진전된 성과라고 규슈관광추진기구 이유미 주임은 말했다.

길이 늘어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제주올레의 정신이 규슈올레에 그대로 이식됐다는 사실이다. 개장식에 참여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우리는 길을 새로 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잊힌 옛길을 되살려내고, 끊어진 길을 다시 잇는 것이 올레 정신이라는 것이다.

규슈올레가 처음 생길 때만 해도 일본 사람들에게 이는 낯선 주문이었다. 자기 지역에 규슈올레를 내게 해달라고 신청하는 지자체 공무원들은 유명 관광지 사이로 매끈하게 닦인 시멘트길을 후보감으로 내세우곤 했다. 올해 개장한 이즈미 코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고시마 현 이즈미 시는 겨울철만 되면 1만 마리가 넘는 두루미를 관찰할 수 있는 유명 철새 도래지다. 철원과 천수만을 거쳐간 두루미가 이곳으로 날아든다. 문제는 철새가 없는 관광 비수기다. 이 시기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기를 바랐던 지역민들은 규슈올레를 적극 유치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들은 3차까지 진행되는 심사에서 두 차례 떨어졌다. 걷기 편한 길을 택한답시고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국도 옆으로 길을 냈기 때문이다.

ⓒ김진석새로 개장한 규슈올레 이즈미 코스는 잊힌 옛 수로와 논둑길, 마을을 연결했다.

연속 탈락으로 ‘눈물의 이즈미’라는 하소연이 나올 지경이 되자 결국에는 제주올레가 직접 나섰다. 현장 답사에 나선 안은주 제주올레 사무국장과 탐사팀은 이즈미 시 공무원과 함께 지역민을 수소문한 결과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오만석 수로(水路)’를 따라 걷는 옛길을 찾아냈다. 오만석 수로는 18세기 무렵 이즈미 시 일대 오노하라 평원에서 쌀 5만 석을 수확하고자 만든 수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이곳 수로를 따라 광활한 논 지대를 바라보며 걷다 다시 마을로 들어서는 올레길이 탄생한 것이다.

‘올레는 자연과 마을, 사람을 잇는다’

‘자연과 마을, 사람을 잇는다’는 것은 제주올레가 표방한 가장 뚜렷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기존 트레킹 코스와 올레길이 차별화되는 지점도 이것이다. 올레길에서는 웅장한 대자연 내지 유명 관광지가 주인공이 아니다. 이들이 주요 배경이 되기는 하되, 중심은 어디까지나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과 마을에 놓여 있다. 유명 관광지 중심에서 마을 중심으로 제주올레가 여행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덕분에 동네 가게나 알려지지 않은 맛집 등 ‘실핏줄 경제’가 살아났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제주올레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3311억원(2010년 기준)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미야마 시가 이번에 규슈올레 19코스를 유치하고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규슈 후쿠오카 현에 있는 미야마 시는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등 명승지를 품고 있어 나름 인기 관광지로 통한다. 문제는 언젠가부터 관광객이 정체 상태에 빠졌다는 것. 이는 제주도가 한때 품었던 고민과도 유사하다. 제주올레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의 한 해 관광객 수는 500만명 이하에 머물렀다. 1970~1980년대만 해도 신혼여행의 메카로 통하던 제주의 매력이 허물어지면서다. 렌터카로 유명 관광지를 대충 돌아본 관광객들은 더 이상 제주를 찾으려 들지 않았다. 중국이나 동남아 관광지에 비해 가격 경쟁력도 갈수록 떨어졌다.

ⓒ시사IN 김은남규슈올레 미야마·기요미즈야마 코스에 있는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입구.

제주올레는 이 와중에 등장했다. 자동차로 스쳐가는 ‘빠름’ 대신 두 발로 걷는 ‘느림’을 택한 올레꾼들은 섬 구석구석을 속속들이 느끼며 제주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했다. 2014년 이후 제주를 찾는 관광객은 매년 1000만명을 돌파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인 유커(遊客·여행자)의 급증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겠지만, 제주 관광의 전반적인 흐름을 극적으로 바꿔놓는 데 제주올레가 기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규슈올레를 유치하려는 지역민들도 이 같은 터닝포인트를 기대하는 것이다.

다만 아직은 규슈올레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한계다. 2016년 3월까지 규슈올레를 찾은 탐방객은 총 22만3620명. 이 중 한국인이 63.3%(14만1500명), 일본인이 36.7%(8만2120명)일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인에게는 아직 규슈올레가 낯선 이름인 것이다. 코스마다 듬성듬성 떨어져 있다 보니 이어 걷기가 쉽지 않고, 교통편이나 다른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는 것 또한 풀어야 할 숙제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규슈올레를 찾는 일본인이 해마다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규슈올레 모든 코스를 걸은 완주자 클럽도 생겼다. 2017년 2월 말 현재 완주자가 총 109명으로, 이 가운데 80여 명이 일본인이다. 3년 전 한 트레킹 대회에 참여했다가 다른 참가자를 통해 규슈올레를 알게 됐다는 아사노 야요이 씨(41)도 그중 하나다. 자신을 78번째 완주자라고 소개한 그녀는 “평소에는 낯선 마을에 접근하기가 어렵지 않나? 그런데 규슈올레는 늘 마을길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간다. 이게 규슈올레만의 매력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제주올레 제공제주올레는 일본 규슈에 이어 몽골에도 올레 브랜드를 수출한다.

몽골에도 ‘올레’ 수출, 6월에 두 코스 개장

10주년을 맞은 올해, 제주올레는 일본 규슈에 이어 몽골에도 올레 브랜드를 수출한다. 이번에는 제주관광공사가 몽골 울란바토르 시 관광청 등과 제주올레를 중개하고 나섰다. 1년 전 업무협약을 맺고 몽골올레길 탐사에 나선 제주올레와 울란바토르 시 관광청은 오는 6월 마침내 2개 코스를 개장한다고 밝혔다. 울란바토르 시 외곽의 마을과 오름, 숲을 걷는 1코스(14.5㎞)와 테를지 국립공원 내 광활한 대자연을 맛보며 걷는 2코스(11㎞)가 그것이다. “지난 10년간 어쩌다 보니 제주올레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보여행길이 됐다. 규슈올레나 몽골올레가 세계의 여행자들에게 올레 정신을 알리고, 이들을 제주로 끌어들이는 관문 구실을 할 수 있기 바란다”라고 안은주 제주올레 사무국장은 말했다.

〈시사IN〉은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제주올레와 함께 이들 올레길을 걷는 독자 이벤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제주올레는 5월14~15일, 몽골올레는 7월26~30일 함께 걷기가 진행된다(자세한 내용은 〈시사IN〉 홈페이지 http://sisain.co.kr/event/travel 을 참조하면 됩니다. 규슈올레 걷기 행사는 가을에 공지할 예정입니다).

※ 이 기사 취재는 규슈관광추진기구 후원으로 진행되었음을 알립니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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