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저녁 숲에서
(로버트 프로스트 시, 이루리 옮김)

이게 누구네 숲인지 알 것 같아
하지만 그는 지금 마을에 살아,
내가 여기 있는 줄도 모를 거야
눈 덮인 자기 숲을 보는 줄도 모를 거야

어린 말은 이상하게 여길 테지,
왜 농가도 없는 곳에 서 있는지
얼어붙은 연못과 숲 사이에,
한 해 가운데 가장 어두운 저녁에

어린 말이 방울을 흔들어 묻네
뭔가 잘못된 건 아니냐고 묻네
들리는 건 스쳐가는 바람 소리뿐
들리는 건 흩날리는 눈보라 소리뿐

숲은 깊고 어둡고 사랑스럽지
하지만 나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지
잠들기 전에 아주 먼 길을 가야 하네
잠들기 전에 아주 먼 길을 가야 하네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로버트 프로스트 글·수전 제퍼스 그림, 이상희 옮김, 살림어린이 펴냄
먼저 그림책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의 원작이자 영감을 준 프로스트의 시(위)를 함께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지나요? 제 눈에는 동짓날 저녁 눈 덮인 숲에 들어가서 겨울 정취를 만끽하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남의 숲에 들어가서 ‘이게 자네 숲이면 뭐하나? 자넨 마을에 살고 숲엔 내가 있는데!’라며 혼자 숲을 즐기는 모습이 통쾌합니다. 하지만 사내는 바람 소리, 눈보라 소리만 들리는, 이 깊고 어두운 숲이 참 사랑스럽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시 한 편에 대해 세 사람, 즉 그림 작가인 수전 제퍼스와 이상희 번역가, 독자인 제가 서로 다른 상상을 하고 서로 다른 서정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그림 작가인 수전 제퍼스는 이 시를 보고 어떤 상상을 하고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요? 이 책을 보기 전에 이 시를 읽은 독자라면 아마도 수전 제퍼스의 그림을 보고 전부 다 기절할지도 모릅니다.

사진보다 그림이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

깜깜한 밤에 눈보라가 칩니다. 키가 크고 가지도 많은 나무 위에는 눈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리고 나무 아래로 누군가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갑니다. 무엇보다 눈꽃으로 뒤덮인 커다란 나무가 독자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깁니다. 수전 제퍼스는 흑백의 소묘로 눈 내리는 밤 풍경의 아름다움을 기막히게 포착해냈습니다. 다만 나무 아래 썰매를 탄 사람만 컬러로 그렸습니다. 수전 제퍼스의 그림은 사실적인 사진보다 인상적인 그림이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를 똑똑히 보여줍니다.

속표지를 펼치면 흰 머리에 흰 수염을 수북이 기른 할아버지를 말들이 다정하게 에워싸고 있습니다. 옆에는 썰매가 있습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나는 모양입니다. 할아버지는 원래 농장을 하시는지 다른 동물도 많이 보입니다. 오리, 소, 닭 등 여러 동물이 자유롭게 할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작은 속표지를 넘기면 두 페이지를 꽉 채운 두 번째 속표지가 나온다는 겁니다. 눈 쌓인 벌판에 여우 가족 세 마리가 화면 좌우로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언덕 위로는 주인공 할아버지가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게 참 놀라운 한 수입니다. 독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할아버지의 썰매를 따라 눈 내리는 저녁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미 프로스트의 시를 읽었습니다. 이 그림책에서 텍스트는 프로스트의 시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림 속에는 프로스트의 시를 더욱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아마도 눈치가 빠른 독자들은 ‘한 해 가운데 가장 어두운 저녁에’라는 구절과 할아버지와 썰매를 연결시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산타클로스입니다. 하지만 수전 제퍼스가 창조한 산타클로스는 완전히 새롭습니다.

그림책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는 그림책이 왜 온전히 새롭고 독립된 예술인지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프로스트의 시는 수전 제퍼스의 상상력을 거들 뿐 이 그림책의 이야기는 그녀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수전 제퍼스가 만든 산타클로스는 눈 내리는 저녁, 숲에 멈춰 서서 무엇을 했을까요?

기자명 이루리 (작가∙북극곰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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