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광장의 주인공은 분명 촛불만은 아니었다. 서울 도심을 뒤덮었던 탄핵 반대 집회 물결은 “일당 받는 노인들”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규모와 응집력을 보여줬다. ‘일당 가설’의 대안으로 떠오른 여러 설명은 대체로 노인 세대의 특수성에 주목했다. “노인 빈곤의 결과다” “노인 소외를 헤아려야 한다” “세대 간 정보 격차가 문제다” “레드 콤플렉스를 내면화한 세대의 비극이다” 등의 가설이 경합하거나, 서로를 지지하며 전개됐다. 타당하다. 15~20% 수준에서 고착됐던 탄핵 반대 여론의 핵심 동력은 60세 이상 세대였다.
 


그런데 ‘노인 세대 특수성 가설’은 은연중에 두 가정을 깔고 있다. 첫째, 이들의 주장 자체보다는 배경에 깔린 사회경제적 맥락이 더 중요하다. 주장 자체는 한눈에도 비논리적이어서, 왜 저런 비합리적 주장을 열정적으로 내세우는지가 더 중요하다. 둘째, 이 기괴한 반동은 특수한 세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통기한이 분명한 풍경이다. 이 세대를 사로잡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저학력의 덫이 사라지면, 우리는 다시 이런 풍경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언론’의 ‘선동’ ‘보도’를 사태 원인으로 지목

정말 그럴까. 〈시사IN〉과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기업 ‘아르스 프락시아’는 이 ‘태극기 세력’의 정치 담론 자체에 주목했다. 태극기 세력(비록 태극기가 이들만의 상징물은 아니지만, 이 표현에 당사자들이 정체성을 강하게 투사하므로 그대로 사용한다)의 사회경제적 배경으로 너무 빨리 논의를 넘기기 전에, 이 무시 못할 열정과 참여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담론의 지형도를 더 입체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이를 통해 기이한 열광이 노인 세대만의 전유물인지도 검토할 수 있다.

분석 대상은 온라인에서 태극기 세력의 양대 거점인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와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다. 분석 시점은 JTBC의 태블릿 PC 보도가 나온 2016년 10월24일부터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열흘 후인 올해 3월20일까지 148일이다. 박사모 게시글은 해당 기간에 올라온 모든 글을 수집했다. 10만3998건이다. 일베 게시글은 추천을 많이 받아 ‘정치일베’(정치 게시판 일간베스트)로 올라간 글을 수집했다. 6만7555건이다. 총 분석 대상은 17만1553건이다(위쪽 〈표 1〉). 한 게시글의 평균 길이는 약 460자로, 전체 글자 수는 7898만9514자다. 200자 원고지로 40만 장에 육박하는데,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24배 분량이다. ‘박근혜’ 키워드는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해서 모든 담론 구조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므로 제외하고 분석했다.

박사모와 일베 분석 결과 두 거점의 핵심 담론 지도는 다른 데이터를 분석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탄핵 이슈가 쟁점이 된 기간에 박사모와 일베는 사실상 같은 사이트였다. 이 기간 특히 일베의 ‘정치일베’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목적의식 뚜렷한 전쟁의 거점기지로 변모했다. 분석팀은 박사모와 일베 데이터를 통합해 분석했다.

 


〈그림 1〉은 태극기 세력의 담론을 압축해 보여준다. ‘언론’의 ‘선동’ ‘보도’가 이 사태를 일으킨 근본 원인이다(이상 붉은색). ‘대한민국’을 지키는 ‘국민’은(이상 푸른색) ‘태극기’ 집회에 ‘참여(행진)’해야 한다(이상 청록색). 이 태극기 세력이야말로 ‘애국’자다(보라색).

허탈할 정도로 단순해 보인다. 파고들어가 보자. 아래 〈표 2〉는 담론 분석에서 중요도가 높은 키워드들을 결과치에 따라 배치한 것이다. 세로축은 등장 빈도다. 해당 키워드가 몇 차례나 등장했는지 보여준다. 가로축은 사이중앙성(비트위니스, Betweenness) 지수다. 해당 키워드가 담론 지도상의 핵심 교차로에 많이 등장할수록, 즉 담론 덩어리들의 연결축 구실을 많이 할수록 이 지수가 높다. 여기서는 연결축 지수라고 부르자.

 

 

 


〈표 2〉에서 대부분 키워드는 왼쪽 아래에 몰려 있다. 몇몇 키워드는 빈도도 높고 연결축 지수도 높다. ‘태극기’가 그렇다. 자주 등장할수록 연결축이 될 확률도 높아지므로 예상 가능한 결과다. 그런데 빈도가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연결축 지수가 유독 높은 키워드가 있다. ‘애국’이다. ‘애국’은 총 4만3064회 쓰여서 등장 빈도로는 6위다. 하지만 연결축 지수로는 2위로 뛰어오르는데, 10만3825회 쓰이는 ‘태극기’ 말고는 ‘애국’보다 연결축 지수가 높은 키워드가 없다.

태극기 세력에게 ‘애국’은 단순한 수사나 구호가 아니라 핵심 가치이자 목표다. 적어도 이들이 사용하는 정치 담론에서, 데이터가 보여주는 감수성은 소외나 빈곤이 아니다. 자긍심이다. 태극기 세력이 보여줬던 집회의 규모·결집력·지속력·자발성은 어떤 긍정적인 감수성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애국’이라는 자긍심은 유력한 후보다.

분석팀은 ‘애국’의 구성요소를 추적했다. 키워드 ‘애국’을 중심으로 의미망 지도를 그린 후 핵심 뼈대만 남긴 결과가 아래 〈그림 2〉다. ‘애국의 삼각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 ‘태극기’ ‘국민’이다. ‘애국’을 떠받치는 세 기둥이다. ‘애국’의 주력부대는 ‘박사모’다. 그리고 오른편에 주적 격인 ‘언론’이 있다.

애국의 삼각형은 어떤 얘기를 들려줄까. 〈그림 2〉와 〈그림 3〉은 출처가 서로 관계없다. 하지만 둘은 절묘할 정도로 닮았다. 〈그림 3〉은 사회학의 거장 에밀 뒤르켐의 종교사회학 이론을, 도덕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가 개념도로 요약한 것이다. 이 ‘뒤르켐의 삼각형’은 인간 사회에서 종교가 작동하는 원리를 보여준다. 종교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참여 ‘행위’와 집단에의 ‘소속감’이 결합된 공동체 생산 메커니즘이 종교다.

 

 

 

 


책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뒤르켐은 이렇게 썼다. “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개념은, 특히 초기 종교는, 조잡스럽고 불완전해서 일시적으로라도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없었다.” 즉, 종교는 자연세계를 너무 부정확하게 설명하므로 믿음 하나만으로는 존속하기 어려웠다. 뒤르켐은 종교가 집단을 정의(‘소속감’)하고, 구성원의 행동을 규제하는 기능(‘행위’)을 했기 때문에 존속한다고 봤다. 이 관점에서 종교란 성스러운 분위기에서, 같은 상징을 사용하고, 주기적으로 모이며, 정해진 의례를 따르고, 그 결과 집단 동질성을 생산하는, 일련의 믿음·행위·소속감 덩어리다.

〈그림 2〉로 돌아가보자. ‘애국’은 ‘대한민국’이라는 믿음의 대상, ‘국민’이라는 소속감, ‘태극기’ 집회라는 집단행동으로 구성된 일련의 덩어리다. 뒤르켐의 삼각형과 정확히 대응한다. 이제 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차례다. 세 꼭짓점의 상세 지도를 첨부한 최종판이 위쪽 〈그림 4〉다.

왼쪽 꼭짓점, 믿음체계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담론 동심원 지도가 있다. 가까운 동심원일수록 더 밀접한 개념이고, 화살표는 개념이 연결되는 경로다. 믿음체계의 관점에서 중요한 질문은, 태극기 세력이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본질이 무엇인가다. 분석팀은 안쪽 동심원에서 국가의 본질적 가치에 해당하는 키워드를 추려봤다. 1시 방향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국가’ ‘자유’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 ‘민주주의’ 등이 국가 정체성과 이어지는 키워드다. 공통점이 있다. 거의 모든 키워드가 바깥 동심원으로 아예 이어지지 않거나, 연결이 대단히 빈약하다. 담론 전개가 그 키워드에서 끝나버린다. 태극기 세력이 내세우는 대한민국의 가치가 무엇인지 연결망을 더듬어갈 때마다 분석팀은 어김없이 담론 절벽을 만났다.

담론 절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키워드는 ‘자유민주주의’다. 이 풍성한 가치와 토론거리를 담은 키워드는, 태극기 세력의 담론 지도에서 놀랍도록 앙상해진다. ‘자유민주주의’는 그저 ‘수호’해야 할 ‘체제’다(붉은색 강조). 내용은 관심사가 아니다. 분석을 총괄한 김학준 아르스 프락시아 미디어분석팀장은 “지도에서 자유민주주의는 텅 빈 단어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담론은 어김없이 절벽으로 떨어진다. 애국은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끝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믿음체계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믿음이란 토론의 대상이 아니므로, 정의상 담론 절벽일 수밖에 없다.

이 텅 빈 믿음체계는 지탱할 버팀목을 찾아 외부의 적을 불러낸다. 적의 위협을 통해서만 텅 빈 믿음체계를 정당화할 수 있다. 동심원 아래쪽으로 뻗어나가는 큰 줄기 두 개가 있다. ‘언론’과 ‘북한’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해야 하는 이유는 그 내재적 가치가 아니라, ‘북한’의 ‘김정은’이 언제나 ‘남한’을 붕괴시킬 기회를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 ‘정치권’과 ‘검찰’ 등이 남한 붕괴 책동에 나섰고, 이 흐름을 ‘좌파’ 언론이 주도해 ‘국민’을 ‘선동’했다. ‘좌파’는 물론 ‘종북’ 세력이므로, 좌파적인 ‘언론’은 종북 세력, 즉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적이다(붉은색 강조). 애국이라는 종교의 핵심 교리는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이고,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는 믿음의 영역이다. 이 빈약한 체제를 떠받치는 것은 내외부의 적, 북한과 종북 좌파로부터 체제를 수호해야 한다는 급박한 요구다. 이 믿음체계는 존재 자체가 역설이다. 상시적 비상사태가 있어야만 안정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믿음체계는 행위와 소속감과 결합해야만 종교가 된다. 오른쪽 꼭짓점인 ‘태극기’는 광장으로 나서는 태극기 세력의 집단행동을 대표하는 키워드다.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하고 ‘서명’한 경험을 나누며, ‘청와대’까지 ‘거리’ ‘행진’을 주장하기도 한다(붉은색 강조).

집단행동은 소속감을 만들어낸다. 위쪽 꼭짓점인 ‘국민’은 5000만 국민을 말하는 키워드가 아니다. 태극기를 든 ‘애국’ 시민이야말로 진짜 ‘국민’이다(붉은색 강조). 대한민국에 살지만 국민이 아닌 이들도 있다. ‘공산화’를 바라고 책동하는 이들이다. 국민이기는 하지만 ‘언론’에 ‘거짓’ ‘선동’당한 피해자도 있다. 이들 때문에 ‘촛불시위’(‘집회’는 태극기 집회에만 쓰는 ‘좋은 단어’고, 촛불의 쌍은 ‘나쁜 단어’인 ‘시위’다)가 커졌다. 거짓 선동을 바로잡으면 결국 태극기 세력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연합뉴스탄핵 확정 이후 보수 대선 주자로 ‘김진태(왼쪽)’ ‘후보’가 거론되고 ‘미국’ ‘백악관’(오른쪽)에 ‘탄원서’를 보내자는 주장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이제 뒤르켐의 삼각형이 완성된다. 애국의 삼각형은 믿음과 행동과 소속감 세 축을 갖춰 종교가 되었다. 이 종교에 성스러운 신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뒤르켐의 종교이론을 확장하여 ‘시민종교’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벨라는 미국의 대통령 취임식과 같은 세속의 의례에서도 종교 원리가 숨어 있다며, 세속 사회에서도 종교의 구동원리가 작동할 수 있다고 봤다.

이렇게 해서 태극기 세력은 ‘애국교’라고 불러도 좋을 시민종교에 도달했다. 이 시민종교는 개인숭배와 동정심 덩어리 이상의 그 무엇이다. 핵심에는 애국이라는 가치가 있다. 믿음체계는 텅 빈 체계이지만, 단단한 삼각형과 주적 북한이 버팀목이다.

북한과 종북세력을 주적으로 간주하고 그들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믿음체계는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애국교’는 한국 보수파의 익숙한 엔진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애국교’는 홀로 보수파를 이끌어갈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한국 보수는 ‘애국교’라는 엔진에 더해, 헌정질서와 법질서에 대한 존중, 시장에 대한 신뢰 등 여러 가치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탈법적으로 기업 자원을 강탈한 박근혜 게이트는 보수 연합체에서 법질서파와 시장파를 결정적으로 이탈시켰다. 보수의 다른 축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자, 수면 아래 있던 보수파의 엔진 ‘애국교’가 날것으로 노출됐다. ‘애국교’는 소속감과 참여행동을 강화해 대응했다. 고난에 대한 전형적인 종교의 대응방식이다.  

이 시민종교는 기독교적 의미에서 완벽한 고난서사를 구축했다. 파면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다. 언론은 예수를 법정에 세운 제사장들이다. 결정적인 물증을 조작했다고 지목된 고영태씨는 예수를 팔아넘긴 가롯 유다다. 박 전 대통령의 파면을 확정한 헌법재판관들은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총독 본디오 빌라도다. 악의 근원인 사탄은 물론 북한이다.

기독교적 고난 서사를 탄핵에 대입해서 이해

기독교적 고난 서사는 예수의 부활로 완성된다. 아래 〈그림 5〉는 대통령 파면 확정일인 3월10일 이후만 따로 떼어 그린 의미망 지도다. 지도 상단의 붉은색과 푸른색은 파면 확정 이전과 거의 같다. 흥미로운 차이는 하단의 연두색 대륙에서 드러난다. ‘미국’ ‘백악관’에 ‘탄원서’를 보내고, 보수 대선주자로 ‘김진태’ ‘후보’가 거론된다. 김진태 의원(자유한국당)은 태극기 세력의 정치적 아이콘이다. 김 의원은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는 양극화보다도 좌경화”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20대 국회에서 손에 꼽히는 강경 우파다. ‘애국교’는 부활의 고리로 강경 우파 대선주자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목했다.

 

 


이는 신흥 종교들이 겪게 되는 ‘제도화의 딜레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신앙심 강한 초기 멤버들로 출발하는 신흥 종교는, 어느 시점이 되면 신앙 몰입 강화와 대중적 확산 사이에서 갈림길에 선다. 대중적 확산을 택하면 이 종교는 제도화되고 새로운 신자가 진입하기 쉬워지지만, 그러려면 신앙심 강한 초기 신자들은 축출되어야 한다. 반대로 제도화를 거부하고 기존 신자들의 몰입을 강화하는 종교는 소규모 신앙공동체로 고립된다. 파면 확정 이후 ‘애국교’는 신앙 몰입 강화 경로로 접어들었다. 이 몰입 강화로부터 이익을 얻는 정치인이나 변호사 등 명사들의 선동이 분명 한몫을 했다. 이 길은 막다른 골목이다. 극단화는 고립으로, 고립은 소멸로 가는 길이다.

태극기 담론이 뒤르켐의 삼각형을 구현하는 시민종교라는 가설은, 이들이 대책 없는 광신자 그룹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난데없이 끝나는 담론 절벽, 태극기라는 상징, 광장의 탄핵 반대파라는 소속감, 북한이라는 주적 등 삼각형을 채우는 내용은 노인 세대가 퇴장할 때 함께 퇴장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시민종교 자체는 보편적 현상이다. 어느 세대든 삼각형 안의 내용만 달리 채워가며 얼마든지 되풀이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시장주의교’라면, 시장의 효율에 대한 토론 없는 믿음과, 그를 수호하는 온·오프라인의 참여행동과, 특정 이론가를 시장주의의 상징으로 공유하는 소속감과, ‘정부 개입을 지지하는 바보’라는 주적을 조합해 시민종교를 구축할 수 있다. ‘민주주의교’라면, 우리 편만 민주주의 가치에 충실하다는 믿음과, 우리 편이 아닌 정치인을 공격하는 온·오프라인의 참여행동과, 특정 정치인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공유하는 소속감과, 정치적 반대파에 반(反)민주주의 낙인을 찍어 만든 주적을 조합해 시민종교를 구축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태극기로 뒤덮였던 광장은 노인 세대 특유의 이슈인 동시에(소외와 빈곤과 정보 격차와 레드 콤플렉스는 여전히 중요하다), 노인 세대만의 문제를 넘어서는 질문을 던진다. 이 세대가 퇴장하면 세대 특유의 상징과 콘텐츠는 사라진다 해도, 시민종교를 엔진 삼는 정치적 동원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이 특수한 세대가 퇴장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다른 정치문화가 등장하라는 법은 없다. 이 특수한 세대는 삼각형을 채운 특정 내용을 대표할 뿐 정치의 종교화 자체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진짜 전선은 정치를 종교화하려는 기획과 다원주의 사이에 있을지 모른다. 이는 광장의 태극기가 사라진다고 해서 끝날 리 없는 싸움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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