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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갈아넣은’ 한국 진보 정당사

2017년 04월 12일(수) 제499호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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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정당의 ‘영원한 조직실장’, 오재영 정의당 원내대표 정무수석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을 통해 1992년 민중 후보 백기완의 대선 출마부터 2017년 박근혜 탄핵까지, 한국 진보 정당의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어느 무명 정당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원내에서 가장 작은 당에 몸담았고,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구의원 선거 한번 나온 적 없는 사람이었다. 역사의 귀퉁이에 한 줄 기록되기도 쉽지 않은 이 죽음은, 그러나 그와 동시대를 살며 같은 꿈을 꿨던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무대 위의 삶을 살지 않았던 그가 남긴 흔적도 많지 않았다. 그를 추모하는 이들은 사진 한 장 더 찍어두지 않은 자신을 책망하며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뒤졌다.

오재영. 1968~2017년. 마지막 직책은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 정무수석.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별칭은, 진보 정당의 ‘영원한 조직실장’. 그를 빼놓고 한국 진보 정당사를 쓸 수 없는 장막 뒤의 조정자였다. 3월22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이병길 제공
진보 세력의 ‘위대한 조정자’ 역할을 했던 고 오재영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 정무수석의 생전 모습.

“재영씨가 노래를 저렇게 부르는군요. ‘낭만에 대하여’가 애창곡인지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동지 오재영을 건강히 지켜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권신윤. 오재영의 부인이자 동료 활동가. 오재영의 추도식이 있던 3월25일, 생전의 영상을 본 권신윤이 추모객들에게 한 말이다. 강한 동질적 경험을 함께한 집단만이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미묘한 정서가 배어 있다. 이 독특한 세대, 독특한 집단의 독특한 궤적을, 오재영의 삶을 통해 들여다봤다.

진보 정당 최고의 무기는 촘촘한 지역 조직


1968년생 오재영은 ‘87학번’이다. 크게 보면 386 세대로 규정할 수 있지만, 그 윗선배 80년대 학번들과는 또 달랐다. 대략 이 세대부터, 1991년 대학생 강경대씨의 시위 중 사망 사건을 겪은 90년대 초반 학번까지, 한국 진보 정당 건설사에 청춘을 바친 이들이 몰려 있다. 오재영의 삶은 그래서 개인사와 세대사와 정당사, 세 차원의 역사가 만나는 교차점이다.

그의 추도사에 빠지지 않는 표현이 ‘영원한 조직실장’이다. 오재영은 민중·민주(PD) 계열 학생·청년운동 시절부터 조직 담당자를 도맡았다. 1992년 민중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백기완 후보 선거대책본부에서도 조직팀에서 일했다. 잠시 구속되었다 나온 1998년, 오재영은 국민승리21에 결합해 진보 정당 건설에 참여한다. 이때부터 2007년까지 계속 조직국장과 조직실장 등 조직 책임자로 일했다. 그런데 진보 정당의 조직 책임자란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자리인가?

“정당에서는 당헌이 곧 헌법이고, 당규가 곧 법률이다. 민주노동당 헌법과 법률 초안을 오재영이 잡았다고 보면 된다.” 김용신. 정의당 정책위의장. 오재영과 동시대에 학생운동과 진보 정당 활동을 함께했던 동료의 회고다. 당헌과 당규는 정당의 권력을 형성하고 배분하는 규칙이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당권을 갖거나 공직선거 후보자가 되는지 여기서 결정된다. 보통 조직 책임자가 여기에 개입할 이유는 없다.

ⓒ연합뉴스
1992년 12월3일 무소속의 백기완 후보가 제주도에서 열린 유세에서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창당기의 민주노동당은 노동·농민·빈민 단체와 각양각색의 운동 정파 등 이질적 조직들의 위태위태한 연합체였다. 당직과 공직 후보 선출부터 중앙당과 지구당의 재정 배분 원칙까지, 조직들 간의 동의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구조였다. 선진국 정당의 당헌·당규를 그저 가져온다고 해결될 리 없다. 당내의 모든 이해관계를 일일이 조율해가며, 어떤 조직도 불만은 있을지언정 떨어져나가지는 않을 수준의 합의안이 나와야 했다. 오재영은 창당 과정에서 여러 부문과 정파와 지역을 넘나들며 이 터무니없는 숙제를 감당해냈다.

동료들이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오재영의 입버릇 중 하나는 “현장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중앙은 존재할 자격이 없다”였다. 현장을 모르는 중앙당은 엉뚱한 지시와 해결책을 내리고, 그러면 현장은 작동을 하지 않으며, 결국 중앙당의 권위가 무너진다. 다시 김용신의 회고다. “정당에서 전략이나 기획이 더 중요하고 멋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무슨 아이디어든 집행하려면 조직을 실제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조직이 없으면 전략도 기획도 없다. 그 출발선에 늘 서 있는 사람이 오재영이었다. 그래서 당 지도부가 어느 정파에서 나오든 오재영은 계속 쓰려 했다.”

2000년대 초반은 민주노동당의 폭발적인 성장기다.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정당 득표 8%를 얻으며 국고보조금을 받게 된다. 초기 당직자들은 이때 처음으로 월급이란 걸 받아봤다고 기억한다. 창당 준비 초기에는 월 20만원 활동비로 버텼고, 2002년 지방선거 직전까지도 최저임금 한참 아래로 활동비만 받고 뛰었다. 2004년 총선에는 정당 득표 13%와 지역구 두 곳의 승리로 10석 원내정당으로 약진한다. 최전성기였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무기 중 하나가 촘촘한 지역 조직이었다. 지구당(국회의원 지역구 단위마다 설치하는 정당 지역 조직. 2004년 이후 불법이다)보다 더 세부적인 동네 조직이 전국에 깔렸다. ‘분회’라고 불렀다. 자발적으로 당비를 내고 동네 당원 모임에 제 발로 나오는 진성당원 조직은 기존 정당들에게 공포였고, 민주노동당에게는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그때 남편은 집에 와서도 마치 콜센터처럼 일했다. ‘몇 명이나 모아야 분회야?’ 이런 전화가 전국에서 쏟아지더라. 사회성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우리 동네에서 분회 모델을 만들어보겠다고 동네 술자리에도 열심히 나갔다.” 부인 권신윤의 말이다. 당은 전국 분회장들을 해마다 한자리에 모았다. 2000년 200명, 2001년 300명이 모이더니, 2003년 8월 무주에서 열린 제3차 분회장수련회에는 1000명이 넘게 몰려들었다. 지역구 한 곳당 풀뿌리 조직 책임자가 평균 4명 이상 살아 움직였다는 의미다. 초창기부터 있던 당직자들은 지금도 ‘진보 정당 영광의 순간’을 꼽을 때 2003년 8월 무주를 빼놓지 않는다. 대중의 눈에 들어오는 성과는 2004년 총선이었지만, 2003년의 무주는 ‘우리가 이기는 길로 가고 있다’라는 자신감을 당내에 심어줬다.

ⓒ연합뉴스
1997년 대선에 출마한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가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주먹을 들어올려 보이고 있다.

“2000년 총선이 끝나고 평가보고서를 보는데 감탄이 나오더라. ‘정공 싼타모 A라인 분회’ 뭐 이런 식인 거야. 조직국이 분회 사업을 입에 달고 살더니 공장 단위도 모자라서 아예 자동차 생산라인마다 분회를 깔아버렸더라고. 이 분회가 나중에 동네로 산개해서 지역 분회의 마중물이 되는데, 특히 울산과 창원 선거에서는 이런 조직이 큰 힘을 발휘했다.” 신장식. 진보 정당 활동가 출신 변호사. 주로 기획 파트에서 일하며 조직 책임자 오재영과 호흡을 맞췄다. 그는 “정파·부문 간 조율, 풀뿌리까지 뻗어나간 조직 확장, 이 두 가지가 오재영의 대표 업적이다. 둘 중 하나라도 실패했다면 민주노동당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미래를 당겨썼다, 즐겁고 아팠다”

오재영이 호흡을 맞춰 일한 당 사무총장 중에는 소속 정파가 달랐던 인물도 있다. 2004년 총선 이후 사무총장으로 왔던 김창현은 민족해방(NL) 계열이다. 김창현은 사무총장으로 올 때부터 당을 움직이는 핵심인 조직실장을 ‘우리 사람’으로 바꾸라는 압력을 강하게 받았다. 버텼다. “그때는 정파 대립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다. 오재영은 항상 ‘일이 되게 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자기 신념과 충돌할 때도 그랬다. 파국으로 갈 안건은 아예 올라가지 않도록 조율하고, 합의안을 어떻게든 장막 뒤에서 만들어냈다. 옛날 얘기지만, 2008년 분당 위기 때 나와 오재영이 사무총장과 조직실장으로 있었다면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이렇게 해서 오재영은 그의 숨은 역할을 아는 동료들로부터 ‘위대한 조정자’로 평가받았다. 역설이다. 조정자는 위대할수록 주목받지 못한다. 성공한 조정은 외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직 실패한 조정만이 파국을 만들어내며 외부에 알려진다. 조직실장 오재영은 정당 인생 내내 당 밖에서는 철저한 무명이었으니, 무명이란 성공한 조정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연합뉴스
2004년 4월15일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후보와 당원들이 당사에서 출구조사 결과에 환호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전성기는 짧았다. 2004년 총선 승리 이후 다음 추진력을 확보하지 못하던 당은 정파 갈등과 실력 부족을 노출했다. 2008년, 당이 깨진다. 분당의 결정적 계기가 된 2월3일 임시 당 대회. 이날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의 당 혁신안이 대폭 수정되어 사실상 부결된다.

“이날 당 대회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혼할 뻔했다.” 부인 권신윤의 회고다. “남편이 ‘안 될 것 같아’라고 하더라. 나는 그게 분당에 찬성한다는 뜻인 줄 알고 화를 냈다. 남편 정파의 노선이 그랬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막으려고 해봤는데 안 될 것 같아’라는 뜻이더라. 당이 깨진 날, 남편이 집에서 엉엉 울었다. 같이 살면서 그런 모습은 처음 봤다.” ‘내 손으로 만든 당’이 쪼개져 나가는 충격은 그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충격은 오재영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 전체를 때렸다. 진보 정당 주위에는 농반진반으로 이런 말이 있다. “소련 붕괴 이후와 민노당 분당 이후에 이쪽 판에 변호사가 갑자기 확 늘었다. 갈 길을 잃은 활동가들이 자격증을 따러 몰려가서 그렇다.”

오재영은 당 재건이 당분간 어렵다면 인물을 앞세워 계기를 만들자고 마음먹었다. 2008년과 2012년 총선에서 노회찬 의원을 도왔다. 노 의원은 2012년 원내 입성에 성공했지만, 당선 10개월 만인 2013년 2월에 의원직 상실형을 받는다. 이른바 ‘삼성 X파일’에 나오는 ‘떡값검사’ 실명 공개가 발목을 잡았다. 분당 충격을 털고 일어서려던 오재영에게는 무릎이 꺾이는 2연타였다.

이맘때 그는 아내에게 “내가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이거(정당 활동)밖에 안 해봤는데”라고 말했다. “그때만큼 남편이 허망함을 느꼈던 적이 없는 것 같다”라고 권신윤은 회고했다. 생계가 곤란할 때 임시직처럼 하던 학원 강사로 아예 인생 새 출발을 할 생각도 했다. 문과 출신이 이과 수학을 새로 공부해 가르치며 3년을 전업 강사로 보냈다. 2016년 총선에서 노회찬 의원이 원내로 돌아왔고, 오재영을 불렀다. 쌓였던 빚을 학원 강사 일로 전부 청산하던 날, 오재영은 부인에게 물었다. “나 다시 돌아가도 될까?” 그는 다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11개월 만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연합뉴스
2008년 2월3일 심상정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 위원장이 임시 당 대회에서 혁신안이 부결되자 굳은 표정으로 떠나고 있다.

신장식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2002년 대통령 선거. 권영길 선본의 실무 책임자 9명(신 변호사 본인도 포함된다) 중에 이재영 정책실장, 조승범 홍보실장, 오재영 조직실장 세 명이 세상을 떴다. 우리는 미래를 당겨쓴 것이다. 몇 년치 시간과 기력을 다 쏟아부으면서도 우리는 즐겁고 호기로웠다. 그래서 지금 아프고, 죽고, 죽고, 아프고….” 신 변호사도 2009년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당을 떠났다.

2002년 대선 실무 책임자 대부분이 당시 30대 초반이었다. 신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있는 당에 가서 시작한 것과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간 경험은 전혀 다르다. 이 당은 우리가 만들었다는 강렬한 집단 체험이 그 숱한 고난에도 우리 세대를 붙들었다. 그러다 보니 진보 정당 20년사가 한 세대를 ‘갈아넣어서’ 굴려온 역사라는 평가는, 아프긴 해도 거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남편이자 동지를 떠나보낸 권신윤은 헛헛한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정당 활동이 사람들에게 삶의 동력이 되지 않고 그저 정체기를 버티고 있다는 느낌, 그게 참 힘들다. 돌아가신 분들의 사인(死因)이야 서로 다르지만, 결국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건 그게 아닐까.”

“너무 책임감 갖고 일하지 마. 사람은 그러다 죽어.” 김종철. 당을 준비하던 1990년대부터 오재영과 함께 활동했고, 지금은 노회찬 원내대표 비서실장으로 있는 그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기자가 그저 그 순간 앞에 앉아 있었을 뿐, 먼저 떠나간 오재영에게 하는 말로 들렸다. 많은 동료들이 오재영을 기억할 때 ‘책임감’을 떠올렸다.

제 신념을 내세우기보다 결과에 책임지려 하고, 빛나지 않는 종류의 헌신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존 정당으로 합류해 유력 정치인이 되지도 않고, 대학 시절 기억을 품고 생활인으로 돌아가지도 않은, 대학 이후의 삶을 통째로 진보 정당에 ‘갈아넣은’ 아주 특수한 세대, 특수한 집단에 속했다. 삶의 사반세기를 ‘대책 없이’ 투자한 이들에 진보 정당은 큰 빚을 졌다. 만약 한국 사회가 진보 정당의 견인에 빚을 졌다고 하면, 동시에 오재영에게도 빚이 있다. 그는 진보 정당의 최전성기를 이끌어낸 숨은 주역이었으되, 아마 한국 정치사에 이름 한 줄 남지 않을 것이다. 그 철저한 무명의 기록이야말로 그가 위대한 조정자였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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