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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세월호 앞에서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2017년 04월 11일(화) 제499호
김연희 기자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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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가 목포신항으로 옮겨지자 미수습자 가족들도 팽목항 분향소에 마련된 9명의 영정을 챙겼다. 영정에는 사진 대신 노란색 종이가 끼워져 있다. 미수습자를 찾는 날 노란색 종이는 사진으로 교체된다.

허다윤양의 아버지 허흥환씨는 지난 3월30일 진도 팽목항 미수습자 가족 숙소 한켠에서 머리를 깎았다. 참사 직후부터 가족들을 카메라에 담아온 이승구 독립 PD가 바리캉(이발기)을 들었다. 원래도 짧았던 다윤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더 짧아졌다. 기자가 이발을 하는 이유를 묻자 허씨는 옅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딸 만나러 가려고 그러지.”

다윤이는 아빠를 잘 따랐다. “아빠 빡빡이”라고 놀리며 허씨의 짧은 머리를 좋아했다. 가족 숙소에 걸린 플래카드 속에서 다윤이는 아빠가 운전하는 자전거 뒤에 타고 아빠의 허리춤을 꼭 잡고 있었다. 2014년 4월16일에도 아빠의 검은색 모자를 가지고 수학여행을 떠났다. 이발을 마친 허씨는 꼼꼼하게 수염을 깎았다.

3월31일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를 앞두고 미수습자 가족들은 팽목항에서 떠날 채비를 했다. 이날 새벽 4시30분, 허다윤양 어머니 박은미씨와 조은화양 어머니 이금희씨는 팽목항 분향소에서 미수습자 9명의 영정을 챙겼다. 단원고 학생인 허다윤·조은화·박영인·남현철, 단원고 교사인 고창석·양승진, 일반인 탑승객인 이영숙, 권재근·권혁규 부자의 영정에는 사진 대신 노란색 종이가 끼워져 있다. 세월호에서 미수습자를 찾는 날 노란색 종이는 사진으로 교체될 예정이다.

ⓒ시사IN 신선영
3월30일 미수습자 허다윤양의 아버지 허흥환씨가 팽목항에서 마지막 이발을 하고 있다.

분향소 단상에 꽂혀 있는 영정 중 혁규군의 영정이 잘 뽑히지 않자 이금희씨가 달래듯 말했다. “혁규야 집에 가자, 이제 집에 가야지.” 참사 당시 혁규는 여섯 살이었다. 그날 혁규네 가족은 제주도로 이사를 가는 길이었다. 가족 네 명 중 혁규의 동생 권 아무개양만 구조되었다. 오빠는 구명조끼를 벗어 한 살 어린 동생에게 입혀주었다. 다섯 살이었던 동생이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혁규군과 아버지 권재근씨는 뭍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박은미씨와 이금희씨는 영정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구니에 담았다. 새벽 5시40분 두 사람과 양승진 교사의 아내 유백형씨가 세월호를 따라 목포로 향하는 어업지도선에 탑승했다. 어둠을 뚫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팽목항에 남은 가족들은 이사 준비를 서둘렀다. 다윤 아버지 허흥환씨와 은화 아버지 조남성씨, 권재근씨 형 권오복씨는 임시 숙소 곳곳에 달아놓았던 플래카드를 챙겼다. 가족들의 염원을 담은 플래카드에는 ‘저희는 유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진도군민, 국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관심과 응원 덕분에 1000일을 견뎠습니다’ 등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목포신항에 마련되는 임시숙소에서 선체 조사 작업을 지켜볼 예정이다.

3월23일 세월호 선체가 올라온 뒤에도 미수습자 가족들은 속을 태웠다. 특히 3월28일 유골 발견 소동 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날 오후 해양수산부는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진흙에서 미수습자 추정 유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제라도 찾아서 다행”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시각과 달리 미수습자 가족들은 충격에 빠졌다. 가족들에게는 인양 과정에서 시신이나 유품이 유실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 8시30분께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조사관들이 동물뼈라고 확인했다. 양승진 교사의 아내 유백형씨는 “너무 놀라니까 눈물도 안 난다”라고 힘없이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3월31일 박은미씨(왼쪽)와 이금희씨가 해양수산부 선박을 타고 동거차도 해상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날 팽목항에 돌아온 가족들은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종일 주먹밥 하나를 먹었다는 유백형씨는 김에 싼 흰죽을 겨우 입에 밀어넣으며 말했다. “오늘 가족들이 처음으로 반잠수선에 올라갔는데 세월호가 너무 커서 끝이 보이지를 않아. 아파트 한 동 높이야. 그런데 그 꼭대기에 구명조끼가 걸려 있는 게 보였어.” 유씨는 “걸려 있는 구명조끼가 보였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3월23일은 이들 부부의 33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유씨는 “결혼기념일이라서 세월호가 올라올 것 같더라고. 이제 새로운 4월16일이야”라고 말했다.

수없이 했던 그 말 “이제 집에 가자”


3월30일 미수습자 가족들은 다시 인양 현장으로 나갔다. 반경 200m에 접어들자 해경 경비정이 미수습자 가족 배의 접근을 막았다. 반잠수식 선박에서는 전날 기상 악화로 중단되었던 작업이 재개되어 세월호를 리프팅빔에 부착하는 고정 작업이 한창이었다. 선체와 리프팅빔을 용접하는지 반짝이는 불꽃이 보였다. 세월호는 녹이 슬고 선체 곳곳이 훼손된 모습이었다. 어머니들은 눈물을 훔쳤다. 말없이 세월호를 바라보던 박영인군의 어머니 김선화씨가 입가에 두 손을 모으고 소리쳤다. “얘들아, 조금만 기다려.”

같은 시각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조사위) 위원들이 탄 배도 반잠수식 선박으로 향했다. 기자도 이 배에 동승했다. 국회(5명)와 유가족(3명)이 추천한 조사위 위원 8명은 6개월간 미수습자 수습과 세월호 선체 조사를 지휘·감독한다. 이날 오전 11시40분께 위원들을 태운 배가 반잠수식 선박에 도착했다. 세월호 선수 부근에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한 자국 2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리프팅빔 방식을 도입하기 전, 와이어(인양줄)를 세월호에 직접 거는 방식으로 작업을 시도할 때 난 상처다. 조사위원들은 직접 반잠수식 선박에 올라 한 시간가량 작업 현장을 둘러보았다. 김창준 선체조사위원장은 “아이들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가서 보니 개인적으로는 (해수부 방안인) 절단이 최선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다.

3월31일 오전 7시, 세월호를 실은 반잠수식 선박 화이트마린호가 목포신항으로 출발했다. 다윤 어머니 박은미씨, 은화 어머니 이금희씨, 양승진 선생님 아내 유백형씨가 탄 어업지도선이 세월호의 뒤를 따랐다. 유씨는 앞서가는 세월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윤 어머니와 은화 어머니는 “이제는 집에 가자”는, 지난 3년간 수없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이날 오전 10시,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내리쬐었다. 화이트마린호는 14.5노트까지 속력을 높였다. 은화 어머니 이금희씨가 말했다. “이제 좋은 일만 있으려나 봐요. 아까는 비가 오더니 이제는 날이 맑네요. 우리는 남아봐서 알아요. 희생자를 찾을 때마다 유가족들은 번호가 붙잖아요. 295번까지 붙었는데 우리는 9명 전부 다같이 296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시사IN 신선영
화이트마린호에 실린 세월호를 바라보는 미수습자 가족들.

3월31일 오후 1시30분, 세월호는 예정 시간보다 1시간 빨리 목포신항 철재 부두에 접안을 완료했다. 마지막 항해를 끝낸 녹슨 세월호를 마주한 유가족들은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한동안 주저앉아 울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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