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외국이어서일까. 일본 규슈 여행이 인기다. 여행기를 보면 열에 여덟아홉은 ‘먹방’이다. 규슈 최대 도시 후쿠오카만 해도 하카타 역과 덴진 역 사이 고깃집, 라멘집, 디저트 카페에서 먹고 즐긴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대개 같은 집들이 나오고 또 나온다. 물론 먹방도 여행의 한 즐거움이다. 하지만 왜 일본 음식이 맛있는지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직업 때문에 나는 일본 여행에서도 음식재료에 주목했다. 그리고 우리와는 사뭇 다른 먹을거리 인프라를 발견했다.

닭고기가 이런 맛이구나, 구마모토 토종닭

일본이나 한국이나 경제 관점에서 닭을 바라보게 되면서 토종닭이 사라졌다. 수입 종의 사료 효율성으로 토종닭을 보면 이런 비효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사료 효율성을 얻은 대신 맛을 잃었다. 토종닭이 사라지고 한참 뒤에야 이를 깨닫고는 긴 시간을 투자해 토종닭을 복원한다.

규슈 중부에 있는 구마모토에도 10년간 복원 작업을 해서 되살아난 닭이 있다. 처음 설명을 들었을 땐 닭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6개월 정도 키우면 몸무게가 5~7㎏, 키가 무려 1m나 되는 닭이었다. 6개월에 대략 2㎏ 나가는 우리 토종닭과 비교해도 대형 종이다. 이름도 크기에 걸맞게 다이오(大王)이다. 귀국해서 토종닭을 키우는 이에게 말했더니 단박에 칠면조 아니냐고 할 정도다.

ⓒ김진영 제공구마모토 토종닭 다이오는 소금만 뿌린 후 숯불에 구워 먹는다.
우리는 토종닭으로 기껏 백숙이나 닭볶음탕을 해먹는다. 구마모토에서는 복원한 닭으로 라멘, 꼬치 등을 다양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중 압권은 구이다. 토종닭은 질겨서 오래 익혀야 한다는 게 우리네 생각인데 여기선 숯불에 굽는다. 갖은양념도 없이 소금만 뿌리고 바로 굽는다. 그런데 참 맛있었다.

토종닭 특유의 콜라겐이 열 수축을 해 쫄깃하면서도 근육에 있던 지방이 녹아 부드러웠다. 국내외 웬만한 닭은 다 먹어봤지만 이런 맛은 처음이다. 닭 자체의 맛이 좋으니 조리법은 단순해도 된다.

구마모토 닭을 접하고 나니 제주 재래 닭, 한협 닭, 우리 맛닭 같은 국내 품종으로도 충분히 재료의 맛을 살린 닭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춘천식 양념닭갈비도 나름 특색 있는 음식이지만, 우리도 이제 원재료의 맛을 오롯이 살리는 닭고기 요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고시마 흑돼지 능가하는 이토시마 돼지

후쿠오카에서 서쪽으로 차로 40분을 가면 이토시마가 나온다. 이토시마는 신선한 농산물을 후쿠오카에 공급하는 위성도시다. 이토시마 선셋로드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맛본 돼지고기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먹어본 어떤 돼지고기보다 뛰어났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가고시마 흑돼지를 능가할 정도였다.

레스토랑에서 돼지 등심 스테이크를 주문하니 소고기도 아닌데 굽기 정도를 묻는다. 과감하게 미디엄 레어로 주문했다. 약간 핏기가 있어야 부드럽게 씹히면서도 육즙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 구워서 나온 일본 돼지고기를 씹으며 우리의 돼지고기 식문화를 곱씹었다. 전국 곳곳에 삼겹살 구이집은 많아도 등심을 스테이크로 구워내는 곳은 떠오르지 않았다.

더구나 돼지고기를 미디엄 레어로 구워 먹었다가는 큰일 나는 줄 아는 사람이 많다. 기생충 전문가 서민 교수가 아무리 돼지고기 기생충 걱정하지 말라고 알려줘도 소용없다. 바삭바삭할 정도로 바짝 익혀 가장 맛없을 때 쌈 싸서 먹는다.

돼지 등심구이에 곁들여 나오는 채소와 쌀도 이토시마가 원산지다. 거창한 구호 없이도 로컬푸드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칠레산 홍어를 곁들인 한식 상차림을 내놓고, 로컬푸드 운운하는 국내 음식점들은 반성 좀 해야 한다.

ⓒ김진영 제공이토시마 레스토랑에서는 돼지 등심 스테이크의 굽기 정도를 묻는다.


미나미시마바라 시에서 만난 12품종의 귤

제주에서 생산하는 귤 대다수가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이다. 근래에는 국내 육성 품종도 재배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 종류가 많지 않다. 우리가 아는 한라봉·레드향·천혜향 등 많은 품종이 일본에서 육종한 것이다.

여행지에서 원조집을 찾듯 원산지에 갔으니 원산지의 맛을 보는 것이 도리다. 같은 품종이라도 지역과 생산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귤의 한 종류인 병감의 경우 사가 현 것은 신맛이, 나가사키 현 오바마 온천마을의 것은 단맛이 도드라졌다.

일본에서 무엇보다 놀란 건 귤 품종의 다양함이었다. 나가사키 현 남쪽에 인구 5만명이 채 안 되는 소도시 미나미시마바라가 있다. 재작년 규슈올레 코스가 새롭게 열린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작은 도시에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국도변 특산물 판매장 시식코너에서 무려 12품종 귤을 선보이고 있었다. 품종에 따라 맛도 모양도 천차만별이었다. 그야말로 취향 따라 귤을 골라 먹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건 ‘문단’이라는 귤 품종이었다. 한국에는 없는 것이었다. 식감이 마치 신맛 나는 스펀지 비슷했다. 낯설지만 참 독특한 맛이었다. 비슷한 품종이 하나 더 팔리고 있는 걸로 봐서 현지에서는 입지를 굳힌 듯했다.

인구 1000만명인 서울은 고사하고, 귤 생산지인 제주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진정한 미식의 시작은 품종에 대한 구분이라고 하는데, 우리 먹을거리 인프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김진영 제공미나미시마바라 시의 특산물 판매장에 진열된 다양한 종류의 귤.


식재료에 대한 이해는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국내 여행도 마찬가지다. 여름 제주 여행을 생각해보자. 누구나 한 번쯤 갈치조림을 먹고 온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제주 갈치가 맛있다 해도 한겨울만큼은 아니다. 조림의 주재료인 갈치나 무의 제철은 한겨울이다. 여름에는 한치처럼 여름이 제철인 생선을 찾아야 제맛을 즐길 수 있다. 계절에 따라 여행지가 바뀌듯 여행지의 맛도 바뀐다. 그 여행지에서는 어느 계절에 어떤 음식이 나는지 알고 가면 여행의 맛이 훨씬 깊어진다.

기자명 김진영 (식품 M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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