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직후 200여 일 동안 수염을 깎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관료 가운데 그나마 진도 팽목항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가족들과 함께했다. 그가 지난 3월26일 세월호 선체 인양 현장에 다시 갔다.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현 자유한국당 의원·왼쪽 사진)이다. ‘연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그의 손에는 미수습자 9명의 얼굴이 담긴 작은 사진첩이 들려 있었다. 이주영 의원을 만나 세월호 참사 교훈을 물었다. 자유한국당 대선기획단장을 맡은 그에게 보수 진영의 대선 전략도 함께 물었다.



선체 인양 현장을 보았는데?

2014년 11월11일 세월호 실종자 수색을 중단했다. 미수습자 아홉 명의 가족들은 세월호가 인양돼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도록, 그러니까 다시 품으로 귀환하기를 긴 시간 기다려왔다. 3년 만에 세월호가 인양되어 선체가 목포신항으로 옮겨가게 됐으니, 사고 현장에서 그분들을 뵐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거 같아서 팽목항을 찾아 미수습자 가족들을 만났다.

ⓒ시사IN 신선영
2014년 가을 팽목항을 떠난 뒤 처음 내려갔나?

연말이나 매년 4월16일 즈음해서 조용히 한 번씩 다녀왔다. 내려가면 희생자 분향소를 꼭 들러서 미수습자 가족들을 만났다.

이번 팽목항 방문 때 이 의원 보좌진이 기자들에게 먼저 “미수습자들 사진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니 보여달라고 하라”며 부탁해 연출 논란이 있었다.

제가 보좌관을 시켜서 의도적으로 그 장면을 연출하지는 않았다. 2014년 11월 295명의 시신 수습을 끝으로 수중 수색을 종료할 무렵 미수습자가 9명 남아 있었다. 그 미수습자 가족 대표가 당시 “다 수습될 때까지 꼭 간직해달라”며 사진첩을 줬다. 그 아홉 분이 돌아오시도록 기원하고 지원한다는 의미에서 간직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걸 지키는 뜻에서 이번에 그 사진첩을 들고 내려가 미수습자 가족들을 만난 것이다.

이번에 미수습자 가족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세월호가 인양되어 선체에 대한 사고 원인 조사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제일 우선적으로 미수습자 아홉 분의 수습을 고려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저도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말씀드렸다. 또 미수습자들의 보상청구권이 ‘사고일로부터 3년’이라는 시효에 걸리는데 아직 유해도 발견하지 못한 처지에 당치도 않다는 말을 했다. 그런 법 조항은 반드시 개정해야 한다고 해서 팽목항에서 돌아와 당정에 전달했다. 지난 3월 말 세월호 미수습자의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를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한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연합뉴스
참사 당시 팽목한 현장에서 200여 일을 보냈는데?

세월호 침몰 사고는 해양수산부(해수부) 감독상의 책임이 큰 인재였지 않는가. 그래서 주무부처 장관으로 사고에 대한 행정적·정치적 책임을 통감하는 차원에서 장관직 사의를 표명했다. 일단 사고 수습부터 하고 보자고 만류해서 현장에 가보니 세월호 유가족들의 분노와 불신이 컸다. 해수부를 비롯해 정부가 수습을 조속히 해야 하는데 유가족들이 보기에 수습은 더디고 여러 가지 미비한 점들이 많았다. 해수부 실국장 참모들은 “이러다 봉변당하니까 좀 피해 있으라”고 권하기도 했는데, 나는 거센 항의를 받더라도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해도 있었다. ‘해수부 장관 보좌관이 상황 수습판 앞에서 피해자 가족과 기념사진을 찍자고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유족들이 격앙됐다. 나중에 내 보좌관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당시 안전행정부 국장이 그런 일을 벌여서 해임되었다. 또 장관이 구조하러 나가는 민간 잠수사들을 붙잡고 못 나가게 했다는 오해도 받았다. 아무튼 정부의 책임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인 된 심정으로 임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당한 뒤 세월호가 인양되니까 정부가 그동안 일부러 인양을 늦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탄핵은 탄핵대로, 또 세월호 인양은 인양대로 진행된 일이다. 조수의 흐름이 가장 느린 소조기 때 인양이 가능해 3월 말이나 보름 뒤인 4월 초를 예상했다. 4월5~6일쯤 인양될 것이라 들었는데 그보다 2주 앞서 시험 인양이 잘 되자 순조롭게 들어 올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동안 친박 강경파들의 인양 반대론이 만만치 않았는데?

일부러 늦추려고 한 건 아닌 걸로 안다. 우리나라 기술력으로는 인양이 어려워서 국제 입찰도 거쳤다. 인양 결정을 하기까지 전문가들이 사전 조사를 하고 평가를 해야 했기에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또 배를 들어 올리는 것은 사나흘 만에 되더라도 사전에 심해에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는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 인양 업체도 의무 작업 시한이 정해져 있어서 늦어지면 하루하루 지체배상금을 부담하기 때문에 일부러 늦출 이유가 없었다.

같은 당 김진태 의원은 인양 비용이 1000억원이 든다며 인양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여당 안에서 인양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이 모두 있었다. 해수부 장관인 내 입장에서는 내부적으로 인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내 반대론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국민적인 공론화 과정을 거쳐서 합의가 필요한 상황으로 가져갔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마련한 연안 여객선 안전대책은?

먼저 낙도 보조항로 제도로서 국가공영제를 도입했다. 과거에는 선사들끼리 입찰을 통해 보조금을 주었다. 60여 개 항로에 연간 100억원 정도 보조금이 나가는데 저가입찰제로 운영했다. 주민이 섬에 살아주는 것만 해도 해양 영토 수호 측면에서 고맙게 보고 그 보상 차원에서라도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게 맞다는 공영화 개념을 제도로 마련했다. 또 선박 노후화가 심각한 문제다. 세월호도 일본에서 20년 가까이 쓰던 퇴출 대상 배를 한국에 들여와 개조해서 쓰다 사고가 났다. 좀 더 새로운 배를 연안 항로에 띄울 수 있게 하려면 선박 공유제도가 필요하다. 국가가 민간 해운사에 어느 정도 보조를 해줘 새로운 배를 공유하다가 15~20년 장기간 운영하면서 국가에 원리금을 갚도록 하는 제도다. 다 갚으면 해운사 소유가 되고, 고물 배는 해외에 처분한 뒤 그 돈으로 새 선박을 다시 도입하는 것이다. 일본이 이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참사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 ‘해수부 마피아’ 문제는 개선되었나?

사고 직후 선박 운항과 관련해 규제 및 안전 부분을 담당하는 산하기관에 입사한 해수부 퇴직자들은 전원 자진 사퇴를 유도해 내보냈다. 그 뒤 내가 해수부를 나오고 나서 전문가들이 없다 보니 퇴직자 일부가 다시 들어와 일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김영한 업무일지’ 등을 보면 청와대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반정부 세력으로 취급했다.

유가족들의 청와대 면담에 관여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데 주력했다. 민간 잠수사들이 위험한 환경에서 일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요청 사항이 많이 있었다. 잠수사·해경·유가족 등과 소통하고 또 요청 사항 중에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왜 못하는지 일일이 설명했다. 수색을 해도 더 이상 시신 발견이 어려운 상황이 되자 미수습자 가족들한테 양해를 구하고 내가 서울에 올라왔다. 그런 처지라 서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몰랐다.

박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을 어떻게 보는가?

대통령은 모든 국정의 최종 책임자니까, 당시 행위에 대한 아쉬움을 얘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대통령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컨트롤할 수 없다는 측면도 인정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주무장관으로서 세월호 3주기가 주는 교훈은 뭐라고 보나?

안전 사회를 위한 노력이다. 대형 참사에 대응하는 국가 전체 컨트롤타워 부재에 대한 지적이 있는데 마땅히 반성하고 점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런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시스템 면에서 고칠 건 고쳐야 한다. 또 사고가 생겼을 때 수습 시스템이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컨트롤타워가 확립되어야 한다. 지도자도 늘 국민 안전을 우선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정치를 ‘꼬마 민주당’에서 시작했는데?

1995년까지 판사 생활하다가 1996년 15대 총선에 ‘꼬마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박계동·김부겸 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이 가장 희망 있는 정치세력이라고 생각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들고 1997년 신한국당과 합당했다.

홍준표 후보와 각별한 인연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1984년 청주지법 형사단독재판장으로 있을 때 공판검사가 초임 홍판표 검사였다. 그때 성명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홍판표 검사 이름 가운데 한자가 ‘판단할 판(判)’인데 칼도변이 들어간다. 이름 한자에 칼이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고, 판표라는 발음도 어려워 내가 ‘판’을 ‘준’으로 바꾸라고 권했다. 당시만 해도 개명이 어려웠는데 내가 법원장에게 잘 부탁드려 개명 허가를 얻어주어 홍판표가 홍준표가 되었다. 1996년 총선에서 내가 ‘꼬마 민주당’으로 갈 때 홍준표 검사도 정치 입문을 했다. 같이 민주당으로 가자고 서로 의논하던 사이인데 홍 검사는 신한국당으로 갔다.

홍준표 후보(자유한국당)의 대선기획단장을 맡았다.

이번 대선에서는 박근혜 정부 책임론이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고 자유한국당이 추구하는 정책과 가치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보수 우파의 경제정책과 안보정책 등이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데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는 홍준표 후보도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홍 후보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 경륜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지만 대선 승리도 일궈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이번 대선에 임할 것이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친박 세력 정리 없이는 후보 단일화가 불가능하다는데?

단일화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법이 나올 것이다. 지금은 이런저런 단일화 조건을 얘기하지만 대선 국면에서는 뺄셈 정치가 쉬운 게 아니다. 어쨌든 보수 우파의 승리를 같이 만들어가야 하기에 단일화가 이뤄질 것이다.

국회 개헌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앞으로 개헌 추진 방향은?

여야 5당 대통령 후보를 국회 개헌특위에 초청해서 개헌 성공을 위해 대통령이 어떻게 협조할 것인지 의견을 듣기로 했다.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되어도 개헌 추진이 잘 안 되는 것은 국회가 (개헌)하자면 대통령이 반대하고, 대통령이 하자면 야당이 반대하는 상황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또 선거가 임박하면 개헌이 어렵다.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거라는 우려 때문에 개헌 합의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권력의 실세가 주도해도 안 된다. 정략적인 의도가 깔려 개헌을 주도하고 추진하려 한다는 의심을 사게 되니까 합의가 잘 안 된다. 그래서 이번에 각 당 대선 후보들 초청해서 개헌 의견을 듣고 개헌은 국회가 주도하고 대통령은 협조하고 방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으려는 것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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