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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덜리스], 불편함 뒤에 보이는 영감의 문턱

2017년 04월 21일(금) 제500호
배순탁 (음악평론가·<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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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내면이 진실하다면, 그것은 작품에 스며들기 마련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작가와 작품을 별개로 사고한다.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자크 라캉의 격언 중 하나다. 나는 철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저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말할 자격이 부여된다면, 다음과 같은 첨언 정도는 하고 싶다. 음악평론가로서 나의 숙명 역시 끝끝내 방황하는 것에 있을 거라고.

그대, 혹시 <러덜리스>라는 영화에 대해 알고 있는가? 얼마 전 블루레이로 출시된 이 영화, 일단 음악이 끝내주니 아직 보지 못했다면 꼭 한번 감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은 내가 영혼의 파트너 김세윤 작가의 영역인 영화 쪽을 침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 음악이 갖는 의미’에 대해 논해볼 작정이다. 내 판단에, 이 의미는 글의 시작에 쓴 저 문장,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줄거리는 빼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본다. “당신은 과연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당연히 영화를 보면, 내가 왜 이런 질문을 여러분께 던졌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러덜리스>(사진)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받아들인다’는 명제에 질문을 던진다.

대중음악 쪽에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신봉해왔다. 이 개념의 핵심은 간단하다. “작가의 내면이 진실하다면, 그것은 작품에 스며들기 마련”이라는 거다. 자연스레 둘이 궁극에서 만나는 그 순간, 작가와 작품은 동일시된다. 진정성의 비호 아래 저 유명한 비틀스를 필두로 수많은 뮤지션·밴드들이 아티스트로 대접받았고, 그들은 과거 클래식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건 포스트모던이 도래하면서부터였다. 작가와 작품을 별개로 사고하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예를 들어 산울림의 전설 김창완씨는 어떤 인터뷰에서 “작품이 발표되면 그것은 나와는 더 이상 상관없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진실로 한번 되새김질해보자. 창작자야 열외로 치더라도, 그것의 소비자인 우리는 진정 이런 방식으로 ‘지속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영원히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러덜리스>는 이 질문을 극단적인 상황 속에 놓아버린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당신은 살인자의 노래를 오로지 미학적으로만 재단할 수 있는가? 살인자의 노래라는 것을 모른 채 그것이 진실로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살인자의 노래라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 같은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역설을 위한 출구는 본래 없는 법이니까.

살인자의 노래를 미학적으로만 재단한다?

어쩌면 이 음악 영화가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기를. 뭔가가 편하지 않다는 느낌은 곧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 만한 문턱에 당신이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는 명제를 당신이 믿는다면, 그 방황이 불편하지 않다면, <러덜리스>는 ‘인생작’이 되기에 충분한 음악 영화다. 잘 말해지지 않은 것을 잊히지 않는 방식으로 들려주고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다.

러덜리스(Rudderless)라는 제목처럼 주인공은 방향을 잃은 삶을 보낸다. 음악 속에서 그는 스스로의 인생에서 망명한 채 갈지자로 방황하고, 고뇌한다. 요컨대, 그것은 인생(의 비극)이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서 어떻게든 속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와 당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수시로 방향을 잃은 채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그저 추악하지만은 않은 생존자가 될 수 있기를, 나는 오늘도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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