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걱정 없는 초등사용설명서
제1강(3월14일) 구본창 아깝다 학원비-학원 상품 분별 능력 기르기
제2강(3월21일) 최수일 초등수학 완전정복-수포자 예방을 위한 재미있는 수학공부
제3강(3월28일) 김승현 초등영어 완전정복-영어, 이젠 이렇게 하세요
제4강(4월4일) 백화현 초등독서 완전정복-독서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독서가 가능해진다
제5강(4월11일) 김형태 초등학생을 위한 스마트폰 리얼스토리
제6강(4월12일) 윤다옥 멀지 않은 사춘기, 우리 아이 발단단계와 관계 맺기
제7강(4월25일) 윤지희 사교육 걱정 없이 우리 아이 키우기


현직 교사인 김승현씨는 전문가들과 함께 영어사교육포럼을 운영하면서 한국 영어교육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 중이다.

김승현(숭실고 교사,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영어사교육포럼 부대표)

‘영어를 조기에 가르치면 우리 아이도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게 되지 않을까?’ 부모들이 흔히 품는 기대다. 이를 충족시키고자 어려서부터 아이를 영어 사교육으로 내모는 부모도 적지 않다. 최근 몇 년간 영유아 사교육비를 폭등시킨 주범 또한 영어였다. 그러나 이런다고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사교육 없는 초등사용설명서’ 연속강좌 세 번째 강사인 김승현 교사는 “오히려 잃는 것이 많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환경에서는 영어교육 접근 방식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3월28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중계한다.  

“수학이 대학을 결정하고, 영어가 평생을 결정한다”는 제목의 책이 있다.  ‘엄마는 전략가’ ‘아이는 99% 엄마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책도 있다. 어쩌면 우리 사교육의 프레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제목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부모들은 고민이 깊다. ‘어릴 때 공부를 시작하면 영어를 우리말처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라면서 조기 영어교육은 엄마 하기에 달렸다는 통념 때문에 압박을 받는가 하면, ‘돈만 있으면 영어유치원, 영어학원은 물론이고 어학연수도 보낼텐데’ 싶어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나 아쉬움을 안고 사는 부모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영어에 대한 이런 통념들이 모두 사실일까? 내가 나름 영어교육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약 5년 전부터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영어사교육포럼을 만들어 운영해 왔기 때문이다. 영어사교육포럼에는 이찬승 전 능률교육 대표를 비롯해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 서유헌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어도현 고려대 영어교육과 교수 등 영어 사교육 전문가 26인이 참여하고 있다. 이분들과 함께 토론회도 수십 차례 했고, 현장에 계신 부모님들과도 만났다. 이런 소개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제 개인적인 지명도가 떨어질지라도 안심하고 오늘 강의를 들으셔도 된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웃음). 지난 5년간 우리 포럼이 쌓아온 경험과 자료를 바탕으로 말씀드리는 거니까.

유창한 것이 잘하는 영어는 아니다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동영상을 하나 보여드리겠다. 얼굴을 가린 한국인 중년남자가 영어로 연설하는 걸 한국인 패널과 외국인 패널들에게 들려준 뒤 이를 평가하게 한 실험을 찍은 EBS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이 남자 연설을 듣고 난 한국인 패널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발음이 너무 촌스럽다” “TV에 나올 실력은 아닌 것 같다”라고 평한다. 당신의 아이가 이런 영어를 구사하면 어떻겠냐는 질문에는 다들 도리질을 한다. “우리 아이는 저런 영어 말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한국인 패널들이 이 연설에 매긴 점수는 100점 만점에 40~60점.

반면 외국인 패널들의 반응은 정반대다. “매우 높은 수준의 단어를 구사했다” “문장구조도 좋았고, 의사도 잘 전달했다”라는 식이다. 이들이 같은 연설에 매긴 점수는 무려 90점대 후반.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그제서야 연설을 한 남자의 정체를 밝힌다. 그 남자는 바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그가 2006년에 했던 유엔 사무총장 수락 연설은 ‘21세기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힌 바 있다. 그중 일부 대목을 발췌해 패널들에게 들려줬던 것이다.

이 영상에 사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집약돼 있는 것 같다. ‘우리 아이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면 좋겠다’는 한국인 패널과 달리 외국인 패널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영어를 잘한다는 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대화능력과 의사전달 능력이 중요하다. 그들의 영어가 유창한지는 보너스일 뿐이다”라고. 그러니 영어를 ‘유창하게’ 잘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오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출발시켰으면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나라 영어 환경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언어를 배우는 환경에 특별한 문제가 없고, 충분한 입력(input)이 제공된다면 누구나 6~7세 정도가 되면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재능에 따른 차이는 있을 것이다. 예체능에 뛰어난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언어적 감각이 뛰어난 아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언어는 재능이라기보다 ‘충분한 입력’에 의해 습득된다.

이에 부모들이 매달려 보는 게 ‘그러니 어릴 때부터 시키면 영어를 모국어처럼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다. 그런데 ‘충분한 입력’이라는 걸 어른들이 너무 우습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갓난아이가 어떻게 언어를 습득하는지 그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3년 동안 자기집에 비디오를 설치해 24시간 촬영하고, 그렇게 얻어진 대용량 데이터를 MIT 연구실에 보내 분석한 과학자가 있다. 그가 소개한 영상을 보면 아이가 ‘가가’ ‘가가’ 하고 중얼거리는 데서 시작해 ‘구가’‘와덜’을 거쳐 ‘워터(water)’라는 단어를 완벽하게 발음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영어 환경에 단순히 노출되는 것뿐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 경험 등이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다.

아이에게 영어 단어를 입력시키고 아이가 조금 더 노력한다고 해서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곧 ‘입력(input)=흡수(intake)’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절실한 내적 동기가 없이는 외국어를 내 것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접하기 힘든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서는 영어를 접할 때 그냥 흘려듣지 않고 집중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영어를 잘하게 돼 있다. 이를테면 이전에 만났던 상대가 어떤 말을 했는지 잘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번에 적절히 활용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집중력은 어느 정도 성장한 학생이나 성인이 의식적으로 노력할 때 더 잘 발휘될 수 있다고 권혜경 한국사이버대 실용영어학부 외래학과 교수는 말한다.

그렇다면 영어 노출시간을 대폭 늘리면 되지 않겠냐고? 한국이나 일본은 평상시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환경에 속한 국가군이다. 일주일에 사흘, 80분씩 영어 공부를 해 봐야 일 년으로 치면 192시간일 뿐이다. 날짜로 환산하면 일 년중 8일밖에 영어를 접하지 않은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영어가 모국어는 아닐지라도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해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은 인도나 필리핀과는 크게 다르다.

이런 환경에서는 아무리 학교 영어 수업시수를 늘리고 영어유치원․영어학원에 보내 아이가 영어에 노출되는 시간을 늘린다 해도 “실질적으로 언어 발달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거나 매우 느리게, 천천히 일어난다”고 언어학자인 반 리어는 말한다. 더욱이 언어발달은 수업중(during lessons)보다 수업간(between lessons)에 일어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어 수업시수를 매주 1시간씩 더 늘린다든가, 선생님들이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걸 영어 공교육 강화정책으로 채택해 봐야 한계가 뚜렷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조기교육’보다 ‘적기교육’이 중요하다

영어 교육을 고민할 때는 이런 기본 전제를 이해해야 사교육 정보 프레임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남는 게 별로 없는 현실이 닥칠 수 있다.
한 영어전문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던 김채현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5살짜리가 2년에 걸쳐 습득한 영어 수준을 초등학교 1학년은 6개월 정도면 달성한다. 실제로 영어학원에서 보면 5살부터 영어를 배운 아이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운 아니라 몇 년이 지나면 같은 레벨에서 만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엄마표 영어’를 하는 그룹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유아기부터 영어교육을 해온 엄마와 자녀는 초등학교 2~3학년쯤 되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네 살 때부터 해 왔다면 만 5년, 태교 때부터 해 왔다면 거의 8~9년을 영어에 매달려 살아온 셈이기 때문이다. 영어 외에도 할 것이 태산 같은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 어느 순간 지쳐 버린다. 이때부터가 진짜 공부를 해야 할 시점인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환경에서는 ‘영어 조기교육’이 아니라 ‘영어 적기교육’이 중요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찍 시작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모국어가 어느 정도 돼서 이해력이 발달하고, 영어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됐을 때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적기가 언제야?’라고 묻고 싶으실 게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에 영어교육을 시작하는 우리 방식이 나름 적절하다고 본다. 반면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하는 게 좋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어쨌거나 여행을 가서도 영어공부를 시킨답시고 엄마와 자녀가 다투는 식이라면 그게 적기는 아닐 것이다.
물론 주변을 둘러보면 어릴 적부터 영어학원을 꾸준히 다녔고 영어도 굉장히 잘하는 아이들이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아이들은 수업 중(during lessons) 집중을 했다기보다 수업간(between lessons)’에도 영어를 끊임없이 접하고 공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집에서는 ‘엄마표 영어’를 계속하는 등 부모 역할도 컸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특수한 경우다. 이를 일반화하면서 자기 아이를 잡을 일이 아니다.

이른바 영어 전문학원의 상술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이런 학원에 다니는 초등학교 4~6학년 아이들을 보면 발음이 정말 좋다. 그러나 대단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내용을 보면 기본적인 일상회화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반기문 동영상에서 보았듯 언어에는 스킬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자기 경험이 담겨야 하는 건데, 이것이 빠져 있는 것이다.

EBS 다큐 팀이 미국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때 영재반에서 우수학생으로 있다 귀국한 한 학생을 데리고 모 어학원에서 레벨 테스트를 받아본 일이 있다. 영어 실력이 1% 이내 수준에 든다는 평가를 받았던 여학생이다. 그렇다면 어학원 레벨 테스트 결과는? 90점 만점에 54점이었다. 이곳 학원장은 나아가 아이에게 강행군을 권했다. 자기네 학원 아이들은 하루에 단어를 700~800개씩 외우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 연․고대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영어 전문학원이라 해 봐야 영어 실력이 막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점수로 존재 증명을 하려 든다. 개중에는 ‘영어 학습 1만 시간을 채워주겠다’며 무시무시한 약속을 내걸거나, 초등학생에게 CNN을 듣게 하는 학원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라. 초등학생 3~4학년이 집에서 KBS, JTBC 뉴스를 보고 있나? 영어학원을 고를 때면 이런 부분을 유념해 주셨으면 한다. 상담석에 앉는 순간 “큰일나셨네요”라고 시작하는 학원은 과목을 불문하고 조심하실 필요가 있다.

‘해외 캠프나 단기 조기유학은 어떨까?’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캠프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안전 등의 문제로 개별적인 활동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현지 상황을 접하기도 어렵고 캠프 내에서 만나는 원어민이 그 나라에서 만나게 되는 외국인 전부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 프로그램을 다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2년씩 유학 보낼 게 아닌 바에야 방학동안 2~3주 가는 캠프는 굳이 보내실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냉정하게 말해 영어 사용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우리에게 가장 합리적인 목표는 원어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잘 훈련된 영어 구사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잘 훈련된 영어 구사자는 영어를 시작한 시기와 관계없이 본인의 노력에 의해 어느 정도 도달 가능하다.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지속적인 노력이 축적된 결과이며, 오랜 시간을 지속해서 언어를 사용하고 듣고 말하는 과정”이라고 언어학자 반 리어는 말한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답답한 얘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영어공부는 달리 방법이 없다. 중 3때까지는 영어공부를 끝내줘야 고등학교 때 수능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고? 불행히도 영어는 그렇게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시사IN 조남진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환경에서는 영어도서관을 확충하고 활용하는 게 영어를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언어학자 크라센은 말한다.

정리해 말씀드리자면 영어는 시작 시기나 방법보다 꾸준함과 집중력이 중요하다. 보통은 하루에 3시간 이상씩 영어에 집중하는 시간을 2~3년 가량 가지면 영어 실력이 크게 향상된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 이렇게 하는 게 좋다고 콕 짚어 말씀드리기는 어렵다. 개인 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외교관이 동시통역관을 꿈꾸는 아이는 이른 나이에 이런 적기를 맞겠지만, 보통은 대학 진학 이후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남들과 비교하며 거기서 상실감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어학연수를 할 때 룸메이트였던 스페인 친구는 영어가 초급 단계였는데도 낯선 전화가 걸려오면 거리낌 없이 그 전화를 받곤 했다. 다른 한국인 친구들은 전화받기를 꺼려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못알아 듣는 대목이 나오면 자기가 오히려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못 알아 들으니 네가 천천히 말해야지’ 하는 식이었다. 언어를 공부할 때는 이런 태도도 필요할 때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국어는 ‘습득’, 외국어는 ‘학습’

마지막으로 영어 교육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쟁점들을 몇 가지 정리해 보겠다. 먼저 어린아이가 우리말을 배울 때 ‘듣기→말하기→읽기→쓰기’ 순서로 터득하는 만큼 외국어 또한 이런 방식으로 배우게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모국어는 ‘습득’, 외국어는 ‘학습’의 요소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습을 하라는 걸까. 일단 문법공부는 할 필요가 있다. “우리처럼 영어를 외국어로 접하는 학습자들은 언어의 규칙을 배우고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 그 언어를 익히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다”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곧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서는 삼인칭 단수에 ‘s’가 붙는다는 걸 아이가 절로 터득할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어는 조기교육이 아니라 적기교육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다시 한번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중학교 이후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한 마디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다. 내적 동기가 강하고 집중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이 결국 다른 과목처럼 영어도 잘한다는 것이다.

조기 영어교육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이같은 내적 동기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별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 영어를 접하게 되면 이를 타율적으로 공부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다 학원까지 잘못 만나면 오히려 초등학교 때 키워야 할 중요한 학습역량 내지 습관, 태도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칫 하다가는 부모와의 관계도 악화된다.

의사 소통 중심 실용영어 교육을 강화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물론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영어회화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회화 표현 정도를 익히는 게 학교 영어교육의 진정한 목표여야 할까? 이는 결국 영어교육에 대한 철학이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 차원에서건 공교육 차원에서건 마찬가지다. 우리가 해외에 나가 레스토랑에서 영어로 막힘없이 주문을 하게 된다고 더 행복해지거나 국가경쟁력이 올라가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어 독해 교육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식기반 사회에서 영어 독해 능력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영어 독해 교육에 대한 반감이 있다는 건 알지만 독해는 영어에서 여전히 굉장히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능력이다. 단순히 영어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다. 경험의 폭과 깊이 측면에서도 그렇다.

무슨 얘기냐. 우리가 일상에서 외국인을 만나 대화할 일은 흔치 않다. 그보다 특정 개인이 영어공부를 통해 새로운 경험과 즐거움을 맛본다면 그것은 문학작품 등 문자로 된 정보와 글을 통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학교에서 독해용으로 배우는 별 의미 없는 짧은 글 말고, 좋은 글을 폭넓게 읽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이 확장되고 풍요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어떻게 말할 것인가(how to say)’보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what to say)’가 중요하다는 게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핵심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라. 우리 모두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러나 마음에 안드는 사람과는 1분 이상 대화를 지속하기 어렵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과 계속 대화를 하는 건 영어가 유창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매력이 있어서나 내가 얻고픈 전문적인 역량이 있어서일 것이다.

시기별로 보자면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는 궁극적으로 성인이 되었을 때를 준비하는 예비 단계다. 일주일에 세 번, 30분 가량 꾸준히 영어를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가 스트레스 받지 않게 동요를 따라 부르며 영어를 배우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EBS 등을 통해 알파벳, 파닉스를 익히게 할 수도 있는데 이 과정에서 부모나 아이나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학습지를 이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하루 30분에서 1시간 가량 시간을 늘려 잡으면서 쉬운 영어동화책을 읽고 따라해 보게 하는 게 좋다. 이를 부모 앞에서 설명하고 쓰게 하다 보면 이것 자체가 좋은 말하기, 글쓰기 훈련이 될 것이다. 초등 단계 아이에게는 어려운 영어 단어를 외우게 했다가 결국에는 이를 써먹지 않아 잊어 버리게 하는 것보다는 좋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게 영어 공부를 위해 훨씬 큰 도움이 된다.

말문까지 틔워주는 영어 독서의 힘

이를 위해서는 한글독서의 중요성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폭넓은 한글독서로 이뤄진 배경지식이 있으면 영어책을 읽고 이해하는 속도도 훨씬 빠르다. 독서습관이 잘돼 있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영어 동화책도 더 잘 읽는다. 그렇다고 독서만 하라는 건 아니다. 책 대신 좋은 전시회를 한 번이라도 더 가본다든가, 뒹굴거리며 멍 때리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좋다.

‘다독(多讀)’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드리고 싶다. 모국어 환경이 아닌 상황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실제와 비슷한 상황을 최대한 많이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원어민을 자주 만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적인 언어학자로 꼽히는 크라센이 강조하는 게 영어도서관이다. 그는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은 어려서부터 영어회화를 가르칠 게 아니라 영어도서관을 많이 지어 보다 많은 책을 접하게 하라. 그러면 이후에 손쉽게 회화도 배울 수 있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에 따르면 이같은 다독이 영어를 배우는 ‘최선의 길’이 아니라 거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영어 다독이란 우리가 이제껏 수업시간에 해왔듯 어려운 단문을 분석하고 번역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읽기 방식이다. 여러분은 영어책을 재미있게 읽어본 경험이 있으신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가장 큰 실패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나마 요즘 영어도서관에 있는 동화책이나 리더스북, 챕터북 등을 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서울 백석중의 경우 페이지마다 그림이 하나 있고 텍스트는 10~15줄 정도밖에 안되는 챕터북을 중학생들에게 매일 읽혔더니 아이들의 중간고사 성적이 수직상승했다고 한다. 독해 실력도 독해 실력이지만 더 중요한 건 영어 말문을 틔우는 데도 이 방식이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너 남자애야(Are you a boy?)”처럼 일상 생활에서는 결코 쓰지 않을 회화를 연습하는 것보다 책에 나오는 문장을 통해 회화를 익히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교육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어사교육포럼이 각급 교육청에 계속 요구한 것도 영어도서관 인프라를 갖추는 한편 엄마들이 지금 영어학원에 맡기고 있는 역할을 학교에서 해주라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에만 가르치고 나 몰라라 할 게 아니라 우리말 독서 시키듯 영어책 읽는 습관을 들여주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우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아이를 바꿀 수 있는 정도는 제한적이라고 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박사는 말한다. “부모가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하기만 하다. 이런 현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손을 놓자는 것은 아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은 적은 짐만 덜어줘도 훨씬 발걸음이 가벼운 법이다”라고.

학교 상담실에서 부모님들을 만나면 “우리 애는 속이 편해 보여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수업시간에 비록 엎어져 자고 있을지라도 아이가 느끼는 불안감이나 스트레스 정도는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부모는 그 불안감을 증폭시킬 게 아니라 안심시켜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서천석 박사는 말한다. 우리 모두 영어로 관계가 나빠지는 일 없이,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수 있는 부모였으면 좋겠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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