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체호프, 베케트…. 아무리 대단한 희곡이라도 다른 나라, 다른 시대 ‘말’에 감동받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희곡은 태생부터 대중적이고 로컬적인 장르가 아닐까. 영화 〈살인의 추억〉 원작이 희곡 〈날 보러 와요〉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희곡이야말로 지금, 여기의 작품이 더 재밌다. 이를테면 배삼식. 그의 작품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아직까지도 이국의 말들에 갇혀 희곡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배삼식 희곡집〉
배삼식 지음
민음사 펴냄
배삼식의 대사는 한국 현대인의 정서를 담아내는 데 독보적이다. 소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서정적이면서도 힘 있는 표현은 따뜻하면서도 비판적이어서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다. 그의 유일한 저작물이기도 한 〈배삼식 희곡집〉에는 작품이 총 8편 수록되어 있다. 소개하려는 두 편은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작품들로, 이번이 못해도 서른 번째 칭찬쯤 될 것이다.

〈먼 데서 오는 여자〉는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에 대한 이야기다. 추모 시설은 혐오 시설이라는 이유로 부지 선정에만 몇 년이 걸렸고 그마저도 ‘추모공원’이라는 이름 대신 ‘시민안전테마파크’로 설립된 그것은 재난 공동체로서 우리의 부끄러운 현재다. 작품은 참사에서 딸을 잃은 부부가 기억과 애도를 위해 겪어야 했던 수모와 모욕을 재현하는데, 그 떨림과 음색과 대사는 그 자체로 우리 사회가 잊지 말아야 할 소리다.

〈3월의 눈〉은 노부부의 애틋하고 애잔한 대화다. 생의 끝에 다다른 부부가 나누는 그리움과 회한의 말들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흩어지고 이지러질 때, 그 서글픈 적막의 순간에서 인생의 진실을 본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말’들의 향연! 그것은 분명 만인의 작품인 ‘고전’은 줄 수 없는 내밀한 기쁨이자 감동의 완전체다. 지금, 여기가 더 재밌는 게 희곡이니까.

기자명 박혜진 (민음사 편집자·문학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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