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 브로콜리가 제작한 영화 ‘007 시리즈’ 속 본드는 플레밍 소설 속 본드와는 사뭇 다른 인물이다. 당신의 뇌리에 남아 있는 본드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숀 코너리의 능글맞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인가, 아니면 로저 무어의 중후하고 신사적인 얼굴인가. 지금 30대들은 아마 피어스 브로스넌의 얼굴을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원작자인 플레밍이 생각한 본드의 이미지는 굳이 따지자면 티머시 돌턴에 더 가까웠다. 격투를 하고도 슈트에 구김살 하나 가지 않던 다른 본드들과 달리 돌턴의 본드는 임무를 수행할 땐 냉혹한 암살 기계였으며 때론 피투성이가 되어 도망치기도 하는 남자였다. 비록 그 무렵 007 영화 제작사인 MGM이 부도나는 바람에 돌턴이 본드로 활약할 기회는 두 편(〈007 리빙 데이라이트〉 〈007 살인면허〉)밖에 없었지만, 플레밍이 그린 본드 또한 그런 인물이었다. 살인에 회의를 품고 있으면서도 임무 중에는 생각을 비우고 암살을 수행하는 ‘살인 노동자’이자, 어둠 속에 숨어서 상대를 기습하는 식으로 근근이 임무를 이어가는 남자.
본드는 영화 수십 편에서 범죄 조직 스펙터와 싸우고 냉전의 균형을 깨려던 소련 강경파를 저지했으며 망상에 빠진 갑부들에 맞서 승리했다. 하지만 세월과의 싸움에서까지 승리할 수는 없었다. 원작에 묘사된 냉혹한 살인 노동자 본드는 출간 직후부터 평론가들로부터 “무모한 살인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플레밍 본인조차 그 점을 인정하면서 “우리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작중 그가 활약하는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판의 본드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생동감을 잃고 화석이 되어갔다. Q가 만든 황당무계한 특수 장비를 써서 위기를 유유히 탈출하는 본드에게서 스릴 같은 걸 찾긴 어려워졌고, 지구도 모자라 달까지 올라가 적과 싸우는 지경에 이른 미션의 규모는 시리즈의 정체성을 흔들었다. 매번 세계 각국 출신의 여자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이 남자의 여성 편력도 갈수록 보기 불편해졌다. 저게 그냥 난봉꾼이지 무슨 스파이란 말인가. 현실성은 떨어지고 허세만 남은 마초에게서 사람들은 서서히 관심을 뗐다.
“본드라는 캐릭터의 본질은 여성혐오자”
결국 다시 기본으로 돌아와야 했다. 제작사는 그간 영화판에서 굳어진 본드의 플레이보이 이미지를 걷어내고, 노동자 계급 청년의 이미지로 무장한 대니얼 크레이그를 기용해 원작 속 본드를 복원했다. 〈007 카지노 로얄〉(2006)부터였다. 사실상 이 영화를 계기로 ‘새로 태어난’ 본드의 생년월일은 1968년 4월13일이다.
크레이그의 본드는 캐릭터를 새로 창조하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007 스카이폴〉(2012)은 원작의 세계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양심을 접고 임무를 수행했으나 그 쓸모가 다하면 폐기 처분되고 마는 첩보 요원들의 존재에 대한 피로와 회의를 탐구하는 지점까지 성큼 걸어 들어갔다.
코너리 이후 수십 년간 굳어진 영화판 본드의 이미지를 폐기 처분한 덕분에, 본드는 그 수명을 연장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재해석의 길도 확보했다. 크레이그는 본드의 이미지를 정의의 사도로 미화하고 수호하는 대신 “본드라는 캐릭터의 본질은 여성혐오자”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드리스 엘바 본인이 에둘러 거절하긴 했지만 팬덤 또한 엘바를 차기 본드의 물망에 올리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본드를 상상할 수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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