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세. 은퇴한 교사. 아내와 사별한 뒤 줄곧 아들 집에 얹혀살다가 며느리와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다.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와 그가 향한 곳은 딸 아야(우에노 주리)네. 서른네 살 먹은 딸아이 혼자 사는 집인 줄 알고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는데 웬 늙다리 아저씨가 다 늘어진 티셔츠 한 장 걸치고 집안을 어슬렁거린다. 마침 집에 들어서는 딸을 식탁 앞에 앉혀놓고 꼬치꼬치 캐묻는 아버지(후지 다쓰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이쪽은 이토 씨이고 지금 저랑 같이 살아요.” “실례지만 자넨 올해 몇인가?” “쉰네 살입니다.” “아야랑 스무 살 차이군.”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려 물 한 모금 들이켜는가 싶더니 이내 이토(릴리 프랭키) 씨를 향해 눈을 치켜뜨며 물으신다.

“직업은 뭔가?” “지금 초등학교에서 일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교사로군.”

은퇴한 교사인 아버지는 반가운 마음에 절로 눈이 커지고 목소리도 밝아지셨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는….

“선생님은 아니에요.” “그럼 사무직인가?” “그쪽도 아니에요.” “교사도 아니고 사무직도 아니면?” “아르바이트로 급식 도우미를 하고 있어요.”

54세. 초등학교 급식 도우미. 그나마도 파트타임 비정규직. 평생 변변한 직업을 가져본 적 없으니 딱히 은퇴할 일도 없는 이토 씨. 어쩌자고 딸아이는 이런 한심한 남자랑 엮인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 만난 사람 면전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 때문에 난감해진 아야가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근데 갑자기 무슨 일로 오셨어요?”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다. 좁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에?” “식사는 일식으로 싱겁게 부탁한다. 이불과 다른 짐은 내일 올 거다. 이상.”

이상이라니. 저기요! 아빠! 이젠 저도 어린애가 아니거든요? 아빠 맘대로 막 이러시면 안 되거든요? 전 아빠랑 살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요오오오!!!


일본 영화 〈아버지와 이토 씨〉는 제목 그대로 아버지와 이토 씨가 마주앉는 이 장면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아들인데도 저 대화를 듣는 순간 금세 아야가 되어버렸다. 당신이 딸이라면 식탁에 앉기도 전에, 현관에 놓인 아빠의 구두를 보는 순간부터 이미 아야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처음 보는데 왠지 낯설지 않은 아버지. 그리하여 두 시간 내내 아야와 함께 울상 짓고 아야와 같이 미소 짓고 결국 아야와 나란히 달려갈 관객이 제법 많을 것이다.

또 가족 얘기야? 또 가족 영화야? 이렇게 눈치 주는 이들에게 이 영화의 감독 다나다 유키가 말한다. “다른 가족을 보면서 우리 가족은 어떤가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가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이 기획되고 있다고 할까요. 그 이유는 가족이란 관계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하면서도 동시에 귀찮고 불가사의한 관계라서 그런 것 같아요. 다양한 형태의 ‘이상적인 가족’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고요.”(〈아버지와 이토 씨〉 보도자료에서 인용)

그러고 보니 독일 영화 〈토니 에드만〉과 같은 출발선에서 뛰기 시작하는 이야기. 하지만 전혀 다른 코스를 돌아 작지만 꾸준한 보폭으로 나름의 결승선을 통과하는 영화. 〈아버지와 이토 씨〉는 내게 남 얘기 같지 않은 남 얘기였다. “어머니는 ‘품’으로 기억되고 아버지는 ‘등’으로 기억되는 존재”라던 누군가의 말에 동의한다면, 당신에게도 꽤 공감할 만한 영화가 될 터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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