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상 60만 국군 통수권자는 대통령이야. 그런데 작전권, 즉 전쟁이 났을 때 군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지휘할 권리는 대통령에게 있지 않아. 전시작전권은 주한 미군 사령관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1950년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작전권을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넘긴단다.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한국 국민과 정부도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으로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국토의 독립과 보전에 대한 비열한 공산 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합친 국제연합의 모든 군사권을 받은 귀하의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또한 격려되는 바입니다.”

이를 두고 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 미군 사령관은 “역사상 보기 드문 주권의 양도”라고 표현한 바 있다. 현재까지도 한국군 작전권은 한·미 연합사령관, 즉 미군 장성에게 귀속되고 있단다. 여기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분명한 점은 한국군은 미국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시작할 수도, 단독으로 수행할 수도 없다는 것이겠지. 당연히 비정상적이고 자존심이 몹시 상할 뿐 아니라 북한이 남한을 ‘미제의 식민지’라고 우기는 근거가 되기도 했어. 그러나 어떤 측면으로는 미국이 전쟁의 열쇠를 쥐고 있음으로써 허다한 남북 간 충돌에도 제2의 6·25(즉 전면전)가 발발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도 있어.

ⓒ연합뉴스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미군에게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1960년대 말 북한은 남한에 대규모 무력 공세를 펼친단다. 베트남 전선에 허덕이던 미국이 두 개의 전선을 펼칠 수 없는 약점을 활용하여 군사적·경제적으로 허약했던 남한을 혼란에 빠뜨림과 동시에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저지하는 등 다양한 목적을 지닌 군사행동이었지. 인민군 수백명이 남한에 침투해서 게릴라전을 벌였고 수많은 희생을 낳았다. 휴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어. 북한 인민군은 수시로 휴전선을 넘어 한국군 진지를 기습했다. 한국군도 당연히 복수를 감행했지. 1960년대 전방에서 군대 생활한 사람들은 단순한 군 복무가 아닌 ‘전투’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아.

1967년 4월12일 일어난 남북 간 충돌을 보면 당시 휴전선은 낮은 수준의 전시 상황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거다. “북괴(北傀: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뜻)가 휴전 이후 최초로 다수의 병력인 60여 명으로 휴전선을 침범케 한 사건(〈경향신문〉 1967년 4월14일자)”이었는데 북한군 1개 소대가 휴전선을 넘어와 남한 초소를 기습하자 이에 분노한 한국군 7사단은 포탄 585발을 북한 측 지역에 퍼부어버렸어(참고로 2010년 연평도 포격 만행 때 북한이 170여 발 정도를 쐈다). 급기야 1968년 1월에는 북한 특공대가 남한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고 청와대 턱 앞까지 찌르고 들어온 사건이 발생했지. 박정희 대통령은 사건 당일 미국 대사를 불러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

ⓒ연합뉴스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앞줄 오른쪽)는 1994년 한국에 전쟁을 통보한 바 있다. 위는 1996년 12월 청와대가 주관한 주한 미군 송년회 모습.
“대사! 30명의 북한군이 쳐들어와 나를 죽이려 했소. 북을 공격해야겠소. 이틀이면 평양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윌리엄 포터 당시 주한 미국 대사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지. “하려거든 혼자 하십시오.” 대한민국 만인지상(萬人之上) 유아독존(唯我獨尊)의 통치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이었지만 단독으로 북한을 응징할 수는 없었어. 미국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렇듯 한국 대통령 관저에 북한 특공대가 육박해도, 1983년의 아웅산 테러처럼 한국 대통령이 해외 순방 때 북한 특수요원이 장착한 폭탄 세례를 받아도 전면전이 터질 조짐은 별로 없었어. 오히려 당시 전두환 대통령 스스로 전방을 누비며 “내 명령 없이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단속하고 다녔단다.

한반도가 정작 위태로운 순간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 전쟁을 결심하거나 그에 준하는 사태와 마주칠 즈음이었어. 1976년 8월18일, 판문점 인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과 승강이 끝에 도끼에 맞아죽는 사건이 발생해. 이른바 8·18 도끼 만행 사건이지. 휴전 이후 최초로 한국에는 전시에 준하는 상황을 뜻하는 ‘데프콘 3’ 단계가 선포됐다.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버리는 작업이 진행되던 판문점 주변에는 ‘데프콘 2(전쟁 준비 완료 상황)’까지 발동됐지.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포함한 7함대가 총동원됐고 미국 본토에서 공군 전력이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괌에서 폭탄을 싣고 날아온 폭격기들이 한반도 상공을 선회했어.

그 엄청난 무력 앞에서 북한도 기가 질리지. 한국군이 미루나무 제거 작전 와중에 북한군 지역까지 넘어가 북한 초소들을 때려 부쉈지만 북한은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어. 결국 김일성 주석이 유감 표명을 하고 미국 측이 이를 사과로 받아들이면서 1976년의 전쟁 위기는 고개를 숙이게 돼.

이후 최악의 전쟁 위기는 1994년에 왔어. 1994년 6월16일 오전,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는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미국의 민간인들을 철수시키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민간인들을 뺀다는 건 전쟁이 임박했다는 뜻이야.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평안북도 영변의 원자로 폭격을 결심했고 그럴 경우 한국군과 미군 및 민간인 사망자까지 예상된 시나리오를 세워두고 있었어. 기가 막힌 것은 미국의 결심으로 파국을 맞이할 당사자였던 한국인들은 거의 새까맣게 그 사실을 몰랐다는 거야. 아빠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의 눈은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미국 월드컵에 집중돼 있었거든.

‘귀신이 곡할 일’이란 바로 이런 형국이군

심지어 미국의 ‘혈맹’인 한국의 대통령도 미국 대사가 “미국 민간인들을 소개(疏開)시키겠소”라고 통보하기 전까지는 미국이 한국의 의사와 관계없이 전쟁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깡그리 몰랐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클린턴에게 이렇게 소리 질렀다고 해. “전쟁은 안 됩니다. 역사와 국민 앞에 죄를 지을 수는 없소.” 그러나 가장 큰 죄는, 그 자신이 정말로 ‘죄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토록 뒤늦게 알게 됐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닐까 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한국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하고 있었어. 그즈음에 벌어진 한국 대 볼리비아 축구 경기의 시청률은 63.7%로 역대 스포츠 경기 가운데 최고의 시청률로 남아 있단다.

그로부터 또 4반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미국은 또 한번 전쟁을 결심한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4년 당시 북한을 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가능한 한 모든 옵션을 준비”하라고 선언한 가운데 미국 항모 전단이 한반도 근해로 모여들고 있어. 북한에는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 훨씬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듯한 김정은 위원장이 버티고 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지. 1994년과 다르다면 우리가 그 위기를 감지해서 걱정하고 있다는 점이겠지만, 전쟁이 미국의 의사에 따라 결정된다는 슬픈 현실만은 벗어나지 못했지. 전쟁이 벌어질 땅은 우리 땅이고 죽어 엎어질 사람들의 태반은 한국 사람인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전쟁이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벌어진다는 것, ‘귀신이 곡할 일’이란 바로 이런 형국이 아닐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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