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으로 간 해녀〉
홍경찬 지음
단디 펴냄
사람들은 섬에 가면 대부분 비슷한 감상을 얘기한다. ‘여기서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섬의 시간은 멈춰 있지 않다. 오히려 육지보다 빨리 흐른다. 섬의 시계는 두 번 흐르기 때문이다.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해의 시계가 한 번, 물이 차고 빠지는 달의 시계가 한 번. 그래서 섬에 사는 사람은 두 배로 부지런해야 한다. 물때를 놓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바다는 고요한 듯 분주하다. 해녀 배의 출항 역시 물때가 결정한다. 해녀 배는 물이 빠질 때 띄운다. 수면이 낮아야 작업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흔히 물질하는 해녀를 일컬어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라고 한다. ‘출향 해녀(제주를 떠난 해녀)’인 저자의 어머니는 또 하나의 저승을 찾아 제주를 떠났다. 그렇게 저승에서 벌어온 돈으로 공부하고 자란 이승의 아들은 글질하는 기자가 되어 어머니의 저승을 취재했다. 저자는 출향 해녀의 기원부터 오늘의 모습까지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해녀들이 걸리는 잠수병의 일종인 ‘외이도 골종’은 최초의 직업병이다. 1987년 통영 연대도에 태풍 셀마가 지나간 뒤에 발견된 신석기인의 뼈에서 ‘외이도 골종’이 관찰되었다. 해녀는 또한 초기 해외 인력 진출 사례이기도 하다. 러일전쟁으로 화약 원료인 요오드화칼륨(질산칼륨 대체물)을 얻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는 감태 채취에 매진했다. 이때 제주 해녀들이 중국 칭다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대마도와 가라쓰 등에 진출했다. 해녀들에게 ‘테왁(물질할 때 쓰는 부력 도구)’은 국경을 넘는 여권이었다.

전쟁 특수를 누린 해녀들은 높은 수익을 얻었다. 그 돈으로 자식들을 일본에 유학 보냈다. 그런데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힌 자식들은 사회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 해녀의 아들인 이덕구는 4·3 사건의 주동자가 되었고, 고준석은 일본 사회주의자의 대부가 되었다. 이들의 고향인 구좌읍 행원리는 4·3 사건 때 가장 큰 피해를 본 곳 중 하나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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