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으면 요긴한 그릇 사두고 싶지요.” 세련되게 살라. 시대에 발맞춰 현대인답게 살라는 일간지의 유혹 또는 요구가 이러했다. 〈조선일보〉 1936년 9월12일 기사(사진)에 따르면, 이 세상은 기계의 시대다. 부엌에서도 마찬가지다. 별별 기계가 다 있어서 부엌살림을 돕는 시대란다. ‘구식’ 가정은 세상 돌아가는 줄을 모른다. 기자는 끝내 흥분했다. “그래서 어디 현대인의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흥분한 기자가 현대인의 가정에 권한 ‘기계’는 커피메이커, 마요네즈 메이커, 달걀 반숙기, 갖은 빼개(栓抜き), 포테이토 매셔(potato masher), 노른자-흰자 분리기 이상 여섯 가지다. 이 가운데 ‘갖은 빼개’는 마개빼개·병따개, 칼갈이, 도리개, 생선비늘 훑개, 유리칼 등이 한데 붙은 다용도 기구인 듯하다. ‘포테이토 매셔’는 감자를 으깨는 데 쓰는 도구이다. 거창하게 기계라고 표현했지만 주방도구, 조리도구쯤이 마침맞은 말이겠다.

1910년대 이래 신식 학교는 여학생에게 서양 음식과 일본 음식 등을 가르쳤고, 동시에 이전과 다른 계량법과 다듬기, 갈무리 방법을 쓴 한식을 가르쳤다. 여학생은 신여성으로 자랐고, 신여성은 다시금 서양 및 일본 음식, 그리고 새 방법으로 만든 한식을 퍼뜨렸다. 그리고 1930년대가 되자 요리 강습회가 폭발했다. 태화관 같은 대형 음식점, YMCA 같은 민간단체,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가정〉 등 유력한 일간지와 잡지가 전국에서 요리 강습회를 열고 신식 음식과 요리법을 퍼뜨렸다. 그리고 스타 강사가 탄생했다.
 

〈조선일보〉 1936년 9월12일 기사 “있으면 요긴한 그릇 사두고 싶지요”

서울 신촌과 논현동,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지점을 둔 전통 병과점 호원당의 창립자이자, 서울에 전해오던 400종이 넘는 상류층 음식을 정리해 〈조선요리법〉(1939)을 쓴 조자호는 이때 태어난 한식 분야의 스타 강사였다. 20년간 중국에 살다 1933년 조선에 혜성처럼 등장한 정순원은 중식 분야의 스타 강사로 우뚝 섰다. 정순원은 “요리란 천 번 듣는 것이 열 번 보는 것만 못하고, 열 번 보는 것이 한 번 자기 손으로 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신가정〉 1933년 12호)라는 일갈을 날리며 요리 강습회의 정당성을 과시할 줄도 알았다. 이들은 인기와 비례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한 시대의 ‘준연예인’이었다. 이만한 분위기에서 매체가 새 주방용품과 도구를 소개했고, 반응할 준비를 마친 신식 가정과 중산층이 열렬히 호응했다.

커피메이커는 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커피는 독특한 기호품으로 일찌감치 상류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흔히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맛본 이후 커피가 조선에 퍼졌다는 소리도 있지만, 커피는 이보다 앞서 상류층 사이에 자리를 잡은 듯하다.

예컨대 1894년 이래 조선을 방문해서 명성황후와 고종을 만난 경험이 있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여행기 〈조선과 그 이웃 나라〉에 조선에서 맛본 커피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버드 비숍은 궁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간식으로 대접받았고, 저녁에는 “수프를 포함해서 생선, 퀘일, 들오리 요리와 꿩요리, 속을 채워 만든 쇠고기 요리, 야채, 크림, 설탕에 버무린 호두, 과일, 레드와인과 커피”로 이어진 서양식 만찬을 대접받았다. 왕실과 극소수 상류층을 사로잡은 커피는 몇십 년 만에 호텔과 다방과 카페를 통해 한번 더 폭발했고, 이후 그림에 보이는 것과 같은 드립 커피포트를 통해 조선 사람의 일상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기자명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