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때 힐러리 클린턴이 했던 얘기가 잊히질 않는다. “여러분을 트위터에서 낚는 그 사람은 핵무기를 맡길 만큼 믿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대선을 앞두고 라이벌을 향해 무슨 험한 말인들 못할까마는 문제는 공화당 의원 가운데도 힐러리 클린턴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를 밀었던 플로리다 주의 상원의원 마르코 루비오조차 트럼프에게 핵무기 발사 코드를 맡기는 걸 내내 찜찜해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대통령 선거에 온 신경을 빼앗겼지만 핵무기와 트럼프를 둘러싼 이런 불길한 예언을 곱씹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계속 북한을 거칠게 다뤄왔는데, 그 과정이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4월6일 트럼프 대통령은 본인 소유의 플로리다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이틀간 정상회담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콜릿 케이크를 먹으며” 북한을 진정성 있게 옥죄달라는 요구를 하다가 시진핑 주석으로부터 ‘본래 한국은 중국 거였다’는 동북아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 시간에 미국은 시리아에 폭격을 가하고 있었는데 트럼프는 케이크를 삼키던 시진핑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놀랍게도(혹은 놀랍지 않게도) 그는 이라크에 폭격을 가했다고 잘못 설명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대선 전 트위터에서 미국이 이라크나 시리아에 개입한 것은 미국민의 세금을 낭비한 미친 짓이었다고 열을 올렸던 것을 기억해냈다면 시진핑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한성원 그림
트럼프는 내친김에 아프가니스탄에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 불리는, 핵폭탄 말고는 그 어떤 재래 폭탄보다 파괴력 있고 비싼 공중폭발 대형 폭탄인 MOAB(모아브·정식 명칭은 GBU-43)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북한을 향해서는 그 이상도 할 수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북한에 ‘똑바로 처신해야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외교라고는 몰랐던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을 향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호통 쳤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친 언사였다. 그의 측근은 한발 더 나아갔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군사행동도 옵션의 하나다”라고 말했다. 한국을 방문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전략적 인내심을 발휘하던 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했다. 측근들은 워싱턴 정가에 트럼프가 ‘매우 동적인 군사행동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리가 먼저 미국을 핵으로 공격할 수 있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던 북한은 6차 핵실험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끝난 건 아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이 핵 게임에는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참가자가 너무 많다.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보다는 좀 더 이성적인 것처럼 비치는 모양이다.

칼럼니스트 다나 밀뱅크는 4월19일자 〈워싱턴포스트〉에 김정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실었다. 그 글에서 밀뱅크는 김정은에게 ‘당신의 선대가 상대했던 미국의 대통령과 트럼프는 종류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식으로 썼다. 그는 트럼프 정부에서는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가 가장 정상으로 보이는데 그의 별명이 ‘미친 개’라고 상기시켰다. 그는 당신도 그럴지 모르지만 트럼프는 미친 짓을 하고도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를 사람이라고 알려주었다. 정 분하거든 많은 미국인이 그렇게 하듯 트럼프와 드잡이질을 하기보다는 소송을 택하는 평화적 대안을 찾으라고 충고했다.

본래 미국이 핵 통제권을 오로지 대통령에게만 부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장군들에게 대량살상무기 운용의 전권을 맡겼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당선하고 나서는 워싱턴 정가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게 핵 통제권을 맡긴 것을 후회할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그 상대가 취임한 뒤 내내 전 세계가 개탄할 일만 벌여온 북한의 ‘경애하는 지도자 3세’가 아니던가. 한반도 남쪽의 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정서가 불안할지 모르는 두 지도자의 핵 통제권이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멀뚱멀뚱 지켜봐야 하는 기막힌 형편이다.

국제 무대의 외교 전문가 가운데는 지금 세계가 1962년 쿠바 위기 이후 55년 만에 핵전쟁에 가장 근접했다는 데 동의하는 이들이 많은데 한반도의 핵전쟁 위험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미국 랜드연구소 출신 미래학자 존 L. 캐스티에 따르면 핵무기를 둘러싼 환경은 이 세계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졌다. 1960년대만 해도 미국과 소련만이 이 게임의 선수처럼 보였다. 뒤늦게 어깨를 들이민 영국·프랑스·중국은 겨우 체면치레나 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면서 상황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은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북한·이란처럼 뒤늦게 핵 개발에 뛰어든 국가 외에도 정체불명의 게이머들이 북적댄다. 옛 소련에서 흘러나온 핵무기와 핵 물질이 유통되는 암시장에서 IS를 비롯한 테러집단과 불량 세력의 그림자가 어른댄다. 어두운 쪽에 재능을 팔려는 핵 과학자, 집요하게 국가 핵무기 통제 시스템에 접근하려는 해커들이 상황을 더욱 꼬이게 한다.

게다가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핵 보유국의 무기고에 비축된 탄두는 낡았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분실하거나 폭발한 무기도 적지 않다. 1950~1993년 사이에 소련이 44개, 미국이 7개의 핵탄두를 잃어버렸다. 소련 핵잠수함 5대와 미국 핵잠수함 2대가 원자로와 함께 사라졌다. 소련이 18개, 미국이 1개의 퇴역 잠수함 원자로를 바다에 버렸다. 우리나라 동해는 원자로의 묘지나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이런 수치는 냉전이 끝난 뒤에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미국이나 소련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런 일에는 입도 벙끗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건 사고가 일어났으리라고 보는 게 상식이다. 혹시 공표되면 전 세계가 뒤집힐 만한 사고가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다. 북한의 경제력이나 기술력을 감안할 때, 핵무기 개발이 속도전을 벌이기에는 가장 적당하지 않은 분야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려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존 L. 캐스티에 따르면 이런 문제가 얽히면 전 세계가 언제 핵무기 연쇄 폭발을 목격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계획적인 핵무기 공격은 핵폭발이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유형일 뿐이다.

지옥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는다면 맥주를 기억하라

핵전쟁 공포가 전 세계로 안개처럼 퍼지고 있다는 징후는 많다. 타블로이드 신문뿐만 아니라 〈워싱턴포스트〉나 〈인디펜던트〉 같은 권위지도 핵전쟁 시나리오나 대피 요령을 다룬 기사를 곧잘 싣는다. 내용을 살펴보면 좋은 소식도, 새로운 소식도 있다. 예전에 기자 공채 시험마다 단골로 나왔던 문제가 ‘핵 겨울’이었다. 1980년 네덜란드 과학자 파울 크루첸과 그의 미국인 동료 존 버크가 핵전쟁이 대기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발표한 논문에 나오는 개념이다. 핵전쟁은 다량의 먼지와 가스를 대기로 분출해 1년 넘게 지구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 것이라는 이론이다. 반론도 있지만 이 이론은 요즘 많이 수정되었다. 핵 공격의 직접 피해보다 대기오염에 따른 후유증이 더 크지는 않으리라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2007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미국의 기상학자 스티븐 H. 슈나이더에 따르면 핵 겨울이라고 부를 만큼 지구 온도가 급강하하지는 않는다. ‘핵 가을’ 정도가 적당하다. 핵전쟁 이후의 세계는 소설 〈더 로드〉가 그린 것보다는 훨씬 덜 참혹할 것이다.

핵 공격 시나리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폭탄은 150kt(킬로톤)짜리 ‘소형’이다. 강대국이 현재 보유한 주력 폭탄에 비해서는 소형이지만 1945년 일본의 히로시마를 한순간에 지워버린 ‘리틀 보이’보다 10배나 강력하다. 옛 소련의 비축 핵탄두 중 바로 이 정도 크기가 가장 많이 사라졌다. 만약 미국이나 유럽에서 불시에 핵폭탄이 터진다면 이 종류일 확률이 높다고 과학자들은 생각한다. 이 폭탄이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근처에서 터진다면 1초 만에 반경 800m가 초토화되고 7만5000명이 목숨을 잃는다. 15초 만에 피해는 6.4㎞로 확대된다. 폭발 중심지에서 반경 32㎞ 안에 있던 이들은 영구적인 망막 손상을 피할 길 없다. 폭발 파편뿐만 아니라 주변의 흙과 잡석까지 기화하면서 발생한 낙진이 서서히 더 넓은 지역을 덮친다. 바람의 영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 80만명 안팎이 한 달 안에 사망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부상하거나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다.

지옥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찾으려면 가슴에 ‘낙진’이란 글자를 새겨야 한다. 폭발 중심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당신이 죽게 된다면 결국 범인은 낙진일 것이기 때문이다. 방사능을 발산하는 낙진은 하나하나가 핵폭탄이나 마찬가지이다. 가장 이상적인 피난처는 두꺼운 벽돌과 콘크리트로 외부와 차단되고 창문이 없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는 낙진 피해를 200분의 1 정도로 줄일 수 있다. 아파트 지하가 최적지이다. 반면 나무 프레임의 1층 주택 거실에서는 방사능을 절반 정도밖에 차단하지 못한다. 계산해봐서 5분 내에 적당한 피난처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쪽으로 가는 게 낫다. 만약 15분 이상 걸린다면 근처에서 가장 폐쇄된 곳에 머물다 낙진 피해가 한 차례 수그러든 1시간 뒤쯤 이동하는 게 옳다. 신속하게 폭발 중심지로부터 자신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파악해야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가는 길에 맥주나 소다수를 집어드는 걸 잊지 마시라. 피폭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공포가 확산되는 것은 핵의 고삐가 풀렸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힘을 길러온 악마가 풀려났다고나 할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설사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까지 힘을 합친다고 해도 과연 핵 확산을 막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전쟁 상인보다는 훨씬 꾀죄죄한 모습이지만 옛 소련 지역에 산재한 무법지대 암시장에서는 밀거래꾼들이 고농축 우라늄과 핵물질을 정체가 의심스러운 바이어들에게 팔아넘기고 있다. 그 물건들은 몇 시간 만에 터키로, 며칠만 지나면 시리아와 이라크로 건너갈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충동적인 언행은 가뜩이나 위험해진 세상에 불확실성을 보탤 뿐이다. (제504호에 계속)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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