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초등학교에 학생이 줄어서 걱정이 태산이라지만 아빠 어릴 적엔 정말 ‘드글드글하게’ 아이들이 많았단다. 골목마다 축구하는 어린이들로 넘쳐났고 집집마다 아이들 울음소리 웃음소리가 가실 날이 없었어. 1970년생 아빠 또래들은 학교에서 오전반 오후반 수업을 나눠서 하는데도 70명씩 꽉꽉 채워 열서너 개 반이 있었지. 가끔 교무실에 가면 눈매가 날카롭고 이대팔 가르마를 탄 가무잡잡한 얼굴의 사진 하나가 걸려 있었어. 박정희 대통령이지. 그런데 박 대통령은 1979년, 아빠가 열 살 되던 해 총을 맞고 돌아가셔. 아빠는 며칠 뒤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을 발표한다면서 등장한 한 장군을 텔레비전 너머로 만나게 돼. 그의 이름은 전두환이었어. 그런데 그해의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아빠는 이웃집 형에게서 이상한 얘기를 듣게 돼. 그 장군 때문에 서울에서 난리가 났다는 거야.

ⓒ연합뉴스2016년 4월13일 전두환·이순자 내외가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를 하고 있다.

“그때 일발 발사하고 캤던 그 대머리 장군 있재? 그 사람하고 친한 장군들이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잡아갔는데 그때 정승화 편하고 그 대머리 장군 편하고 총싸움이 붙어 가지고 쫄다구들 몇 명이 죽었다 카더라.”

당시는 비상계엄령 상태였기 때문에 계엄사령관인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의 이름은 친숙했지만 아직 ‘전두환’은 낯선 이름이어서 ‘대머리 장군’이라고 불렀지.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관련이 있다며 상관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질렀어. 이걸 12·12 군사 반란이라 부르는데, 젊은 군인 3명이 죽었어. 반란군에 맞선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끝까지 보호하다가 죽어간 김오랑 소령과 전역을 2개월 남긴 최고참이었는데도 반란군에 맞서다가 죽어간 정선엽 병장, 그리고 반란군 측에 동원된 박윤관 상병.

그 죽음들로부터 6개월도 안 돼 전두환 장군은 대한민국에 또 하나의 피바람을 불러와.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이야. 네가 태어나기 20년 전에 있었던 일인 만큼 네게 6·25전쟁이나 3·1운동 비슷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빠로서는 그 전두환이, 그 피 묻은 손으로 놀랍게도 ‘회고록’을 써서는 “빼앗은 장갑차를 끌고 와 국군을 죽이고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으로 국군을 사살했다”라며 ‘폭동은 폭동일 뿐’이라고 우겨대는 데에 이르러서는 참을 수 없는 욕지기에 온몸을 떨게 된다. 오늘부터 네게 전두환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입을 빌리는 형식으로 전해주고자 해. 그가 등장했던 ‘대망의 1980년대’ 이후 무고한 한국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용감한 이들이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자 하는 뜻이지. 먼저 아빠와 동갑이었던, ‘드글드글하게’ 많았고 ‘5월은 푸르고 우리들은 자라는’ 줄만 알았던 한 어린이의 이야기야.

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는 이렇게 죽었다

나는 1970년생, 개띠였어요.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족들하고 오순도순 살면서 학교에 충실히 다니던 효덕초등학교 4학년생이었지요. 형도 있고 누나도 있고 여동생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상 타오는 건 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는 엄한 분이셨지만 타온 상장을 내놓으면 기분이 좋아지셔서 아이스크림 값도 적잖이 쥐여주시곤 했죠.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일도 못 나가시고 집에 누워 계셨는데 저랑 여동생이랑 놀다가 좀 다퉜어요. 꼬맹이가 울고 난리를 치니까 아버지가 버럭 하셨지요.

아버지 얼굴을 보니 목침이라도 날아올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는 소작농이었죠. 한창 일할 것 많은 봄에 자리보전하고 계시니 그 속이 얼마나 갑갑하셨겠어요. 냉큼 집을 나섰죠. 잽싸게 고무신부터 챙겼어요. 9일 전이 내 생일이라 어머니가 사주신 신발이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날은 일요일도 아니었는데 학교에 가지 않았어요. 광주 시내에서 큰 일이 벌어져서 학교를 쉰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우리 집 앞으로 난 도로에 트럭들이 먼지 무지하게 뿜어내면서 지나갔어요. 거기엔 군인 아저씨들이 많이 타고 있었죠.

우리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꽤 많은 애들이 군인 아저씨라고 그랬어요. 그 멋진 군인 아저씨들이 그야말로 트럭 타고 지나가는 걸 보고 어떤 애들은 깡충깡충 뛰며 손을 흔들기도 했어요. 이상한 건 아저씨들이 꼭 우리 아버지처럼 화난 얼굴을 하고 우릴 거들떠도 안 보는 거였지만.

ⓒ연합뉴스1980년 5월27일 계엄군이 시민군의 거점이었던 광주 금남로 전남도청을 다시 장악했다.

갑자기 탕탕 총소리가 온 마을을 울렸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건 군인 아저씨들끼리 싸움이 난 거였어요. 트럭에 실려 오던 군인 아저씨들을 적으로 오해한 또 다른 군인 아저씨들이 방아쇠를 당겼고 그러다가 여러 명이 죽어버렸지요. 트럭에 탔던 군인들은 공수부대라고 했고 오해해서 총질한 군인들은 보병학교라는 곳의 군인이라더군요.

그래도 우리는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놀았어요. 트럭에 탄 군인들이 다시 우리 쪽으로 다가서는 것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뛰어놀았어요. 그때 군인 아저씨들의 얼굴을 먼발치에서 한 번이라도 봤더라면 눈치 빠른 나는 살았을지도 몰라요. 시퍼런 눈을 하고 이를 득득 갈면서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던 그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봤으면 나는 친구들에게 “튀자!” 외치고 내가 먼저 달음박질쳤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드르륵 뭔가 기분 나쁜 소리가 귓전을 때렸어요. 학교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의 반도 안 되는 거리에서 군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죠. 워매 우리를 쏜다! 아이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뛰기 시작했죠. 그런데 내가 운이 없었어요. 고무신이 벗겨진 거죠. 맨발이라도 뛰었으면 살았을 텐데 그만 고무신을 줍겠다고 멈춰 서고 말았어요. 그리고 내 몸에는 “들어가는 구멍은 볼펜 구멍만 한데 나올 때 구멍은 접시만 해진다”는 그 무서운 M16 총탄이 열 발 가까이 틀어박히고 말았어요. 열한 살, 내 이름 전재수는 그렇게 너덜너덜한 시체가 되고 말았어요.

왜 쏘았냐고 묻고 싶지는 않아요. 이제 와서 이유를 따져봐야 뭘 하겠어요. 하지만 지금까지도 묻고 싶은 질문 하나는 있어요. 그때 날 죽인 아저씨들은 내가 뭐로 보였을까요. 열한 살이었던 제 가슴에 십자 조준을 맞추면서 그 아저씨들은 날 뭐로 봤을까요. 내가 커 보였을까요. 어른으로 보였을까요. 전두환 아저씨(내가 살았을 때 당신은 아저씨 나이였으니까), 당신 눈에는 내가 폭도로 보이나요? 아군끼리 치고받은 화풀이로 몇 마리 죽여도 되는 오리로 보이나요? 내가 들고 있던 고무신을 보면서 엄마는 정신을 잃었어요. 아버지는 자기가 나가라고만 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며 울었죠. 아버지는 술이라도 마셨지만 엄마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그만 4년 만에 화병으로 내 곁에 왔어요. 그때 날 죽인 군인 아저씨들은 우리 엄마도 함께 죽인 셈이죠.

1980년 5월24일 만 열 살 하고 9일을 더 산 광주 효덕초등학교 4학년생 전재수는 그렇게 죽었어요. 그런데 대머리 장군. 대한민국 군인더러 대한민국 국민 머리를 수박처럼 깨고 대검으로 찌르고 군홧발로 뭉개라고 명령했고, 그 “사기를 살려주라”고 했던, 세상에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 헬기에서 기관총까지 쏘는 참극을 연출했던 대머리 아저씨는 아직도 살아 있네요. 나라에서 돈 대서 경호해주고 있네요. 나라에 바칠 돈은 수백억원인데 29만원밖에 없다고 하네요. 그래도 고향을 방문해서 모교 체육대회에 가면 그 앞에서 모교 학생들이 큰절을 올린다지요. 다시 아저씨에게 물을게요. 아저씨 나는 왜 죽었나요. 그리고 더 궁금한 것 하나. 아저씨는 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나요? 왜 호의호식하며 잘살고 있는 건가요.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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