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가 길어지던 지난겨울 어느 밤이었다.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가 대뜸 “우리도 세계시인선을 내려고요”라고 말했다. 박 대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타박을 이었다. “한국 시집도 안 팔리는데 외국 시집이 팔리겠어요?” 그 역시 지체 없이 답했다. “좋은 시들은 꼭 소개하고 싶어요.” 대형 출판사라 해도 시집 1쇄는 500부만 찍는 일이 허다하다. 그만큼 안 팔린다. 출판업은 늘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고, 출판인들이란 ‘팔리는’ 무엇을 만드는 데는 영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다. 귀갓길이 복잡한 마음으로 비틀거렸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봄날의책 세계시인선’이 정말 출간됐다. 제목은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로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1908~1994)의 시집이다.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북유럽의 현인’으로 불리는 노르웨이의 국민 시인이다. 그가 생전에 남긴 시 400여 편 중 30편을 추려 묶었다. 이번이 국내에 소개된 하우게의 첫 시집은 아니다. 2008년 하우게 탄생 100주년을 맞아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실천문학사)가 출간된 바 있다. 여느 시집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일부 눈 밝은 독자와만 만난 후 절판의 순서를 밟았다.

시를 추리고 번역한 임선기 교수(연세대 불문과) 역시 하우게의 존재를 몰랐던 사람이다. 박지홍 대표가 “김소연 시인이 이분 시가 참 좋다던데…” 라며 은근슬쩍 번역 의뢰를 했을 때만 해도, 거절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렸다. 노르웨이어를 모르기 때문에 ‘중역을 피할 수 없다’라는 부담이 컸다. 그러나 단 몇 편의 시를 읽는 동안 결정했다. 그 자신이 시집 세 권을 낸 시인으로서 ‘무책임하게도’ 이 시들을 소개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4월25일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주최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누가 제게 진짜 시가 어떤 것이냐 물으면 저는 하우게의 시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농부와 대장장이에게 쓸모 있는 ‘시’

하우게의 시는 쉽다. 여기서 ‘쉽다’는 말은 전적으로 상찬이다. 하우게는 시 ‘베르톨트 브레히트’에서 그에 대해 “그런데 그의 시는 너무 쉬워서/ 현관에 놓인 나막신처럼/ 바로 신으면 되었지”라고 썼다. 하우게의 시 역시 마찬가지다. 인구 1000명 남짓의 노르웨이 울빅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그곳을 떠난 적 없는 하우게의 직업은 정원사였다. 그의 시는 꼭 그 직업을 닮았다. 하우게에게 시는 농부에게, 대장장이에게, 목수에게 “쓸모 있다 말을 듣는 것”(‘시’ 중에서)이다. 그는 자연의 편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독해하려 했다. 이를테면 농장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고양이다. “당신이 방문했을 때/ 고양이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이 농장에서/ 그 녀석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고양이’ 중에서)라고 쓴다. 그것이 하우게가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4월25일 출판기념회에서 ‘나뭇잎집과 눈집’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등 하우게의 시 네 편을 낭독한 허은실 시인은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노르웨이의 소설가 크나우스고르의 감탄이야말로 하우게의 시를 설명하는 문장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하우게는 1994년 ‘옛날 방식’으로 죽었다. 그 어떤 병증도 없었다. 단지 열흘 동안 먹지 않는 방식으로 존엄하게 죽음을 선택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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