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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하필 ‘쁘아송’이었을까?

2017년 05월 04일(목) 제503호
이승한 (칼럼니스트)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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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계기로 동성애자의 존재가 가시화되기 시작했지만,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2000년 홍석천이 <여성중앙>과 한 인터뷰에서 커밍아웃을 했을 때 한국 사회가 충격에 휩싸였다는 건 딱 절반만 진실이다. 그가 1990년대 중반 MBC 청춘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을 통해 선보인 패션 디자이너 ‘쁘아송’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바람에, 그의 성 정체성을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많았다. ‘쁘아송’은 당시 한국 사회가 남성 패션 디자이너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압축한 캐릭터였다. 체력적으로 연약하고, 말투는 사근사근하며, 감정 표현이나 몸동작이 호들갑스럽고, 여성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외국계 예명의 소유자. 남성 패션 디자이너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이건 한국 사회가 당시 게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홍석천 본인도 훗날 “난 (배역 소화를) 못하고 싶었는데 너무 잘한 탓에 자꾸 비슷한 캐릭터를 요구받았다”라고 말한 쁘아송은 성 소수자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배역이었다. 그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에도 적잖은 이들이 보인 반응은 “내 그럴 것 같더라”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의 커밍아웃을 그러려니 하고 넘긴 것은 아니었다. 배역이 남긴 잔상은 ‘게이라서 쁘아송 배역을 그렇게 잘 소화한 거였구나. 게이는 진짜 저렇구나’라는 식의 낙인효과로 이어졌다. 그런 까닭에 일각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쁘아송’을 연기한 홍석천이 커밍아웃 1호 연예인이 되어 고정관념을 강화할 것은 또 뭐냐”라는 불만도 있었다. 불만을 말하는 이들도 알았을 것이다. 선택을 기다리는 무명 배우에게 배역을 가려서 받을 수 있는 호사가 허락되었을 리 없고, 우연히 그 배역을 맡아 연기한 배우가 홍석천이었을 뿐이다.

ⓒ연합뉴스
홍석천은 2000년 커밍아웃한 이후 3년가량 방송계를 떠나 있어야 했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홍석천의 커밍아웃은 용기 있는 일이었고, 그의 고백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 게이라는 존재가 가시화되었다는 공로에 이견을 달 수 없다. 하지만 악의 없는 우연이 겹치는 바람에 ‘쁘아송’ 홍석천의 커밍아웃은 게이에 대한 당대 한국인들의 편견을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소비되었다. 그가 평소 ‘쁘아송’과는 다른 말투로 말하고, 다르게 걷고, KBS <출발 드림팀>을 통해 육체미를 과시하던 사실은 쉽게 지워지고, ‘게이’와 ‘쁘아송’이라는 키워드만 남았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홍석천은 KBS 토크쇼 <야! 한밤에>의 방송 녹화 3시간 전에 섭외를 취소당했다. 동성애자가 아동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아이들 교육에 안 좋다는 근거 없는 이유로 MBC <뽀뽀뽀>에서 퇴출당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 프로그램을 위해 태어난 연기자 같다”는 극찬을 받았던 홍석천이었다. 의연하고 당당한 자세로 찍은 커밍아웃 영상은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만 편집되어 사용되었으며, 홍석천과 친했던 남성 연예인들 중 상당수는 자신도 마녀사냥에 휘말릴까 두려운 마음에 손을 내밀어주지 못했다. 새 천년이 오면 자신도 당당히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마음에 자기 정체성을 세상에 밝힌 대가로 그는 3년가량 방송계를 떠나 있어야 했다. 2003년 홍석천은 김수현 작가의 SBS <완전한 사랑>에서 커밍아웃한 게이 승조 역으로 컴백했다. 그 이후에도 온전히 방송계에 자리 잡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2013년 JTBC <마녀사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커밍아웃 이전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 MBC에서 방영된 청춘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에서
홍석천(오른쪽)은 섬세하고 호들갑스러운 패션 디자이너 배역을 맡았다.
그런데 왜 하필 ‘패션 디자이너’였을까? 나는 앞에서 ‘쁘아송’을 두고 ‘한국 사회가 남성 패션 디자이너에 대해 가졌던 편견’에 기반한 캐릭터라 설명하고는 다시 ‘성 소수자에 대한 대중의 편견’이라 부연했다. 굳이 두 번에 걸쳐 쓴 이유는, 그 당시 한국 사회가 두 집단에 대해 가진 편견이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패션계가 유독 일찍부터 게이들의 진출이 활발한 분야였던 것도 사실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남성 디자이너 앙드레 김 또한 독신을 유지하며 특유의 섬세한 말투와 행동거지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아마 결정적인 이유는 성 소수자를 ‘외국 문화의 유입과 함께 휩쓸려 들어온 좋지 못한 풍조’ 정도로 여기던 한국 사회의 편견이었을 것이다. 동성애가 특정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난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1960년대 도시화 이후 씨족 부락을 벗어나 익명성을 쟁취하게 된 한국의 성 소수자들이 자생적인 커뮤니티를 이뤄왔다는 사실을 ‘모르쇠’했던 이들에게, 동성애는 ‘쾌락 중심 서구 문화의 무분별한 유입’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동성애는 ‘쾌락 중심 서구 문화의 유입’ 결과?

씁쓸하게도 이와 같은 편견은 일부 종교단체만의 주장은 아니었다. 2007년 3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이하 범민련)에서 발행한 기관지 <민족의 진로> 3월호에 실린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사회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남 사회가 민족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민족문화 전통을 홀대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외래적으로 침습”해온 문제들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같은 글에서 “199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 개방화, 세계의 일체화와 구호가 밀고 들어오던 시점부터” “외국인 노동자 문제, 국제결혼, 영어 만능적 사고의 팽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유학과 이민자의 급증, 극단적 이기주의의 만연, 종교의 포화상태, 외래 자본의 예속성 심화, 서구 문화의 침투 등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문제들”이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1987년이나 1997년이 아니라 2007년에 나온 주장이었다.

그러니 패션 디자이너야말로 당대의 한국 미디어가 남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남성을 묘사할 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직업군이었던 것이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에 집착하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만드는, 결정적으로 외국의 영향을 받은 직종.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집약한 직업군이 바로 패션 디자이너였다. 홍석천은 하필이면 게이와 패션 디자이너라는 이중의 편견이 모두 집약된 ‘쁘아송’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불행히도 자연인으로서 했던 홍석천의 커밍아웃이 ‘쁘아송’ 이미지에 덮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편견과 고정된 이미지를 반복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한국의 미디어는 오랫동안 게이와 트랜스젠더, 드래그 퀸 등의 개념을 섞어 묘사하기 시작했다. 홍석천을 계기로 동성애자의 존재가 가시화되기 시작했지만,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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