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친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무슨 무슨 지도사가 붙은 민간 자격증 공부는 하지 마라.”

충고 덕분이었는지 나는 자격증 학원에 등록하지는 않았지만, 몇 달간 ‘감정평가사’라는 공인된 면허를 따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다. 공인된 자격 문서야말로 한국처럼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일종의 보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일 그때 〈관료제 유토피아〉를 알았더라면, 세상에 만연한 규칙과 절차의 하나로써 자격증을 다시 들여다보았을까?

2016년 봄에 출간한 〈관료제 유토피아〉는 국가의 공권력 같은 거대 담론을 다루면서도, ‘학생증이 없다고 도서관에서 내쫓는 행위는 정당한가?’ 등 생활 속 규칙도 언급한다. 이 책의 원제는 ‘규칙들의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로 규칙과 관료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여기서 면허도 다루는데,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면허 기관이 업그레이드라는 명목으로 불필요한 고급 과정을 이수하게 만든다고 꼬집는다. 면허는 그것을 따기 위한 훈련을 예비하지만 해당 업을 보호하는 진입장벽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자격 기관만 잇속을 챙기기 쉽고, 그 비용을 떠안는 건 개인이다.

지난해 8월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신설이 이슈가 되었을 때, 미용인들이 4년제 학사학위 받는 것을 대학생들이 꺼려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관료제 유토피아〉 관점에서 보면, 실력으로 입증할 실무에 학위를 덧대어 형식적인 스펙만 늘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에서 누가 이득을 볼까?

〈관료제 유토피아〉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김영배 옮김메디치미디어 펴냄
비슷한 얘기를 다른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제, 알아야 바꾼다〉(2017)의 저자 주진형은 “‘도장’만 찍는 상급자가 너무 많다:직장민주화”라는 파트에서, 한국은 곳곳에서 자격증을 양산해 개인들이 실력으로 평가받을 길을 사전에 차단해버린다고 썼다. 시원하면서도 서글펐다.
기자명 정소연 (메디치미디어 편집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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