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00일을 맞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무엇보다 대선 최대 공약이던 건강보험 개혁, 일명 ‘오바마케어 폐기 작업’이 우군 공화당의 반발로 실패했다. 또 다른 우선순위인 무슬림의 미국 입국 금지 역시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강행하려 했지만 법원의 거부로 좌초됐다. 트럼프는 취임 100일 연설에서 “우리 행정부의 첫 100일은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다”라며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국민과 주류 언론의 평가는 싸늘하다.

트럼프의 100일을 초라하게 만든 요인은 또 있다. 선거운동 때부터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러시아 게이트’ 의혹이다. 러시아가 지난 대선 때 트럼프에게 유리하도록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현재 상·하원에서 진행 중인 조사만 4개다. 설상가상으로 연방수사국(FBI)까지 공식 수사를 벌이고 있다.

트럼프 정부 초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됐다가 러시아 게이트 의혹으로 재임 24일 만에 낙마한 마이클 플린은 쇠고랑을 찰지도 모를 위기에 빠졌다. 플린을 포함해 트럼프 선대본부장을 지낸 폴 매너포트, 전 외교참모 카터 페이지, 측근 로저 스톤 등 4명이 현재 FBI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트럼프가 지난 2월 플린을 경질한 직접적 이유는, 그가 주미 러시아 대사인 세르게이 키슬라크와 한 회동을 감췄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플린과 러시아 측 간의 수상쩍은 커넥션이 잇달아 폭로되었다.

ⓒReuter마이클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러시아 게이트 의혹으로 재임 24일 만에 낙마했다.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3성 장군 출신이다. 그는 2015년 12월 러시아 국영방송 RT의 10주년 행사에 참석해서 인터뷰 및 강연료 등 4만5000달러를 받고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 연방 헌법에 따르면, 플린 같은 공무원·군인 출신은 사전 승인 없이 외국 정부나 유관기관에서 금품을 받을 수 없다. RT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매년 2억 달러 정도의 보조금을 받는 국영 홍보기관이다. 2012~2014년 국방정보국(DIA) 국장을 지낸 플린은 퇴역 직후 국방부 감찰관실로부터 ‘외국 정부나 유관기관의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경고를 듣고도 이를 무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뿐 아니다. 플린은 퇴역 후 자신의 이름을 딴 정보 컨설팅 회사를 설립한 뒤 터키계 회사를 위해 로비스트로 일했다. 2015년 가을부터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인 2016년 11월까지 이 회사에서 세 차례에 걸쳐 53만 달러를 받았다. 2016년 2월에는 트럼프 선대위에 안보 참모로 합류했다. 그런데 플린이 연방 법무부에 로비스트로 정식 등록한 것은 지난 3월 초였다. 1년6개월 동안이나 터키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도 이를 신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해외 국가를 위한 로비스트로 일하면 반드시 연방 법무부가 규정한 관련 신고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이 같은 플린의 비위와 관련, 미국 상원과 하원에서는 복수의 조사위원회가 조사를 벌이고 있다. FBI는 플린 등 트럼프의 전·현직 측근이 러시아 인사들과 어떤 성격의 접촉을 했는지 수사 중이다. 설상가상으로 국방부도 플린을 ‘사전 승인 없이 해외 정부 관련 기관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별도의 혐의를 잡고 조사에 들어갔다. 국방부 감찰실이 추가 혐의점을 밝혀낼 경우, 플린은 범법자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게 된다.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으면 최대 5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하원 정부감독위원회 위원장인 공화당의 제이슨 차페스 의원은 “전직 장교는 러시아든 터키든 해외 국가로부터 금품을 받을 수 없다. 플린이 돈을 받았다면 위법행위를 한 것이고 이에 따른 결과도 감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 게리 코널리 의원은 CNN에 출연해 “플린이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라고 확언했다.

ⓒAP Photo트럼프 대통령은 플린이 징역형을 받을 경우 사면령을 발동할 가능성이 높다.
임기 내내 ‘러시아 수렁’에서 허우적댈까

사면초가에 몰린 플린 측은 적극 소명에 나섰다. 러시아 국영방송 RT 방문에 대해서는, ‘국방정보국에 방문 전후 활동을 이미 상세히 브리핑했고 추가 질문에도 성실하게 응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플린은 RT로부터 4만5000달러를 받고도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제대로 소명하지 못했다. 또 그는 지난 3월 하순, 검찰의 불기소를 전제로 의회 조사 및 FBI 수사에 협력하겠다며 ‘거래’를 제안했다. 미국에선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혐의자가 수사 협조의 대가로 불기소를 요청할 경우 사실상 스스로 유죄를 인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의회 조사관들은 플린의 요청을 거부한 상태다. 아직 조사가 초기 단계인 데다 불기소를 대가로 플린한테 충분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플린을 전적으로 신임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 같은 움직임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다. 플린의 ‘수사 협조 대신 불기소’ 요청 건이 알려진 직후, 트럼프는 “플린이 당연한 요구를 했다”라고 강변했다. 심지어 플린에 대한 여러 조사들을 “언론과 민주당이 대선 참패 이후 개시한 역대급 마녀사냥”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안보 참모로 플린을 기용했다는 비난에 대해 트럼프는 “이미 전임 오바마 행정부 때 최고 수준의 신원조회를 거쳤다”라며 엉뚱하게 오바마 전 대통령을 탓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플린을 엄호하면서, 워싱턴 정가에선 벌써부터 ‘사면론’이 거론되고 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2007년 당시 딕 체니 부통령의 최측근인 루이스 ‘스쿠터’ 리비가 기밀 누설 혐의로 2년6개월 징역을 선고받자 사면령을 발동한 바 있다. 트럼프 역시 플린이 유죄판결을 받아도 사면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 법률에 따르면, 대통령은 사실상 무제한적 사면권을 갖고 있다. 유죄가 확정된 뒤 사면하는 게 보통이지만, 수사 중인 피의자에게도 사면령을 발동할 수 있다. 트럼프가 사면 카드를 꺼낼 경우 FBI 등 수사기관은 플린의 금품 수수 문제는 물론이고 지난 대선 당시 러시아 선거 개입 의혹 관련 혐의까지 일체의 수사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다만 실제로 플린을 기소 전에 사면할 경우, 민주당과 국민의 거센 저항에 직면할 것이 명백하다. 아무리 독불장군인 트럼프이지만 정치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부시 전 대통령도 공화당 인사들에게서 ‘리비를 기소 전에 사면하라’는 요청이 빗발쳤지만 정치적 부담 때문에 거부한 바 있다. 플린이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뒤에 트럼프가 사면령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하지만 사면 카드까지 현실화할 경우 법적 일단락과는 무관하게 러시아 게이트 의혹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재임 기간 내내 ‘러시아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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