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술의 한계에 도전하는 섬세한 터치” “독특한 품격의 묘사.” 사무라 히로아키의 작품 〈무한의 주인〉에 쏟아진 찬사다. 일본 만화계에서 그는 무엇보다 ‘작화와 연출의 달인’으로 칭송받는다. 최첨단 시대에 연필 데생을 고집하며 만화의 예술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누군가 자신을 만화광이라 소개하면서 정작 〈무한의 주인〉을 모른다면, 그의 말, 그리 신뢰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조언해주고 싶다.

그의 차기작 〈파도여 들어다오〉는 여러모로 참신한 만화다. 간단히 말해 〈무한의 주인〉은 ‘예술적 잔인함’을 추구한 작품이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팔과 다리가 절단당하는 가운데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술적 쾌감을 느끼게 하는 만화였다고 할까. 〈파도여 들어다오〉는 다르다.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 먼저 이 작품의 주요한 정서는 ‘따스한 유머’다. 물론 〈무한의 주인〉에서도 유머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숨통을 틔우는 정도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파도여 들어다오〉에서 사무라 히로아키는 작정하고 웃긴다. 독자들은 주인공이 어설퍼서 웃고, 사고뭉치여서 웃고, 때로는 참 어이없게 대범해서 웃을 수 있다. 이 작품, 재미있고 웃긴다. 〈무한의 주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표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파도여 들어다오〉는 라디오에 대한 만화다. 유튜브도 아니고 라디오라니. 일본이어서 한국과는 사정이 좀 다를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곳은 미국 다음가는 음악 시장이니까. 그런데 일본에서도 라디오의 현실이 밝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지금도 라디오를 어디선가 듣는 사람들이 있구나.” 주인공 고다 미나레의 말이다.

사무라 히로아키의 작품 〈무한의 주인〉(왼쪽)과 〈파도여 들어다오〉.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좀 황당무계하다. 삿포로의 수프 카레집 직원이자 화끈한 성격을 지닌 고다 미나레가 술집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술에 취해 얘기를 하는데, 알고 보니 그 괴짜 같은 남자가 라디오 PD였다는 게 주된 스토리다. ‘새로운 DJ를 발굴하고 싶다’는 욕망 아래 그는 고다 미나레를 전격 데뷔시킨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 고다 미나레가 일하는 카레집에서도 해당 방송국의 라디오를 틀어놓는데, 놀랍게도 리즈 페어의 ‘화이트초콜릿 스페이스 에그(White Chocolate Space Egg)’가 흘러나온다. 왜 인상적이냐고? 지금 유튜브에 접속해 이 곡을 감상해보기 바란다. 단언컨대 이 곡을 한국에서 틀 수 있는 방송은 〈이글 FM〉과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빼면 몇 없을 거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한국에 몇 없는, 최신 팝을 적극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자랑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이 만화를 보면서 나의, 더 나아가 라디오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의 성과’에만 포커스를 맞춘다면 “전 국민이 다 아는 팝송”을 고집하는 게 맞다. 이게 가장 안전하고, 가장 편안한 방법이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고, 만화에서 주인공이 중얼거린 것처럼 어디선가 라디오를 듣는 어린 친구들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결국 라디오의 미래는 이 친구들에게 달려 있다. 그들이 계속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주변의 듣지 않는 친구들까지 ‘꼬시게’ 만들어야만 라디오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파도여 들어다오〉는 그 해답이 DJ의 매력에 달려 있다고 얘기한다. 배철수만큼 개성 넘치는 DJ, 대체 어디 숨어 있느냔 말이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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