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일러 라시가 태어난 주는 ‘바몬드 카레’의 고장 미국 버몬트다. 하지만 버몬트 사람들은 바몬드 카레의 존재를 모르고, 한국인들은 그 바몬드가 버몬트라는 사실을 모른다. 서로 몰라도 사는 데 불편이 없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이 두 세계 사이에, 타일러가 서 있다.

처음에는 신기했다. 당장에라도 꼬부랑말로 인사를 걸어올 듯한 벽안의 청년은 너무나도 정확한 발음으로 사자성어를 줄줄 읊었다. 물론 국내 체류 외국인이 200만명이 넘는 한국에서 한국어를 잘하는 이방인이 특이한 존재는 아니다.

그런데 타일러의 한국어는 뭔가 달랐다. 단지 어려운 단어와 매끄러운 억양을 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타일러가 출연한 JTBC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 46회에서 ‘인간은 혐오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VS 없다’를 주제로 토론이 열렸던 날. 타일러는 교육을 통해 혐오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일견 천진난만한 주장을 했다. 토론자 대다수가 차이·차별·혐오 등의 개념을 구분 없이 사용하며, 이것들이 없어지기 힘들기 때문에 혐오주의는 극복될 수 없다는 논지를 폈다.

ⓒ이우일 그림
타일러의 반격은 아름답고도 명쾌했다. 각 용어들의 사전적 의미를 설명하는 대신 “모든 씨앗이 꽃이 되는 건 아니다”라는 비유를 들었다. ‘다름’은 혐오주의의 씨앗이지만, 그 꽃을 자라게 하는 빛과 물인 타자화, 사회적 분위기 등은 교육을 통해 차단할 수 있다고, 그렇게 끔찍한 꽃을 언젠가는 영영 피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통찰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세에서 비롯됐다. 그는 비난하고 트집 잡기 위해서가 아닌, 알기 위해서 질문을 던졌다. 모두의 말을 경청했다. 많은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는 ‘다름’과 ‘같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게 분명한 단어를 골라 썼다. 그의 말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법을 생각하게 한다.

그를 둘러싼 환경을 빼고 지금의 타일러를 말하기 어렵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인 미국 국민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다. 타일러는 포르투갈계 미국인 어머니와 오스트리아 이민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캐나다 퀘벡 주와 교류가 많은 버몬트 주 출신답게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어를 배웠다. 국제학과 외교학을 전공하며 한국어와 스페인어도 익혔다.

그는 일상 속에서, 또 배움을 통해서 국민국가의 경계를 오갔다. ‘경계인’은 회의(懷疑)하는 삶이다. 같은 것을 같지 않게, 다른 것을 다르지 않게,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긴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잘 안다. 말하려는 주제를 적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번 더 회의한다. 질문을 통해 당연함과 의문을 오간다. 그런 과정을 거치기에 쉬운 말로 답을 던져놓는다. 한국이 위험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미국의 테러, 일본의 지진, 한국의 북한 문제가 유사한 위험 수준이다”라고 별일 아니라는 듯 답한다. 미국 사람들은 유럽을 모른다는 비난에 “미국은 유럽연합처럼 여러 나라나 다름없는 주들의 연합체다”라고 응수한다. 3년 전 광복절에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하나의 개인으로서 나에게도 자유를 되찾은 날이다”라는 글을 써, 국가 단위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게 광복절이 갖는 의미를 전했다. 타일러의 말과 글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몰라도 사는 데 불편함이 없었던 것들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면 세상은 조금 더 풍요롭고 흥미로워진다. 잘 몰랐던, 혹은 당연해서 관심 갖지 않았던 것들과 친숙해지는 과정은 타일러에게 즐거움과 기쁨이다. ‘범생이’ ‘똘똘이 스머프’ 같은 별명을 가진 이들에게 자주 뒤따르는 부정적 편견이 있다. 예컨대 사회성이 떨어진다거나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모습 따위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편견과 거리가 있다. 자신의 또 다른 별명인 ‘요정’처럼 그는 밝은 미소와 장난스러운 손짓으로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주로 책으로 배운 한국어여서 한자어나 문어체 표현이 많지만, 창의적인 비유와 차근한 설명을 통해 납득시키려 노력한다. 스스로 공부하고 알아가면서 느낀 희열이 다른 사람에게도 즐거움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글을 쓰고 말을 건넨다.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도록 돕고 싶다”라는 그의 꿈을 응원한다. 그가 태어나 첫 꿈을 꾸게 된 5월6일을 축하하며.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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