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마흔이 넘은 딸이 있다. 그 딸은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된 어머니와 치매 증상을 보이는 아버지를 시설에 두고 그들이 살던 아파트에 막 도착한 참이다. 그들이 거의 한평생 살았던 아파트는 50년에 달하는 세월의 더께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녀는 부모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살아온 딸이 아니며, 그녀의 부모도 근사한 노인과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만 않으면 절대 ‘죽음’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아흔이 넘어도 불같은 어머니 엘리자베스와 혼자서 못하는 일이 더 많은 아버지 조지, 그리고 그들의 딸인 라즈 채스트가 헤어지는 과정을 꼼꼼하게 담아낸 만화 에세이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의 한 장면이다. 부모의 죽음은 언젠가는 현실이 된다. 나이 든 부모를 홀로 책임져야 한다는 불안감, 병구완으로 바닥나는 통장 잔고가 불러일으키는 막막함 등이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담백하게 묘사된다. 특유의 따뜻한 유머 역시 잃지 않는다.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라즈 채스트 지음김민수 옮김클 펴냄
처음 이 책의 원서를 펼쳤을 때 독특한 그림체, 일반적인 만화책에 비해 넘치는 텍스트, 보편적인 방식을 비껴가는 전개가 과연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싶어 출간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세련된 유머 감각과 구성은 꽤 매력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랜 세월 치매를 앓아온 할머니와 이별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부모와의 헤어짐은 용서와 화해, 사랑만 이야기할 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거나 앞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출간되고 두 번째 맞는 가정의 달이다. 부모와 관계를 잘 풀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라즈 채스트와 함께 웃고 울며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기자명 홍경화 (클 편집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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