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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시대

2017년 05월 16일(화) 제505호
차형석·전혜원 기자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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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의 시대는 광화문에서 비롯되어(탄핵 촛불집회) 광화문에서 꽃필 예정이다(광화문 집무실). 개혁과 통합이라는 두 가지 숙제를 그가 어떻게 풀어낼지 관심을 모은다.




ⓒ사진공동취재단
5월1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선서식을 마친 뒤 국회를 나서며 승용차 위로 몸을 내밀어 손을 흔들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대선을 하루 앞둔 5월8일 서울 광화문에서 마지막 유세에 나선 문재인 후보


ⓒ시사IN 신선영
2014년 8월 문재인 대통령(당시 의원)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유민 아빠’ 김영오씨와 함께 단식 농성을 벌였다.


ⓒ시사IN 이명익
5월8일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선거 유세장에 모인 자들은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문재인”을 연호했다.


ⓒ시사IN 조남진
지난 3월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9차 촛불집회에 문재인 대통령(앞
가운데)이 참석해 촛불을 들었다.


ⓒ문재인캠프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다. 사진은 2007년 11월13일 두 사람의 모습.


ⓒ연합뉴스
임기 이틀째인 5월11일
참모들과 함께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문재인 대통령.



5월9일 밤 11시57분. 뒤늦게 도착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가가 포옹했다. 포옹을 나눈 뒤 두 손을 맞잡았다. 그때였다. 안 지사가 문 대통령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볼에 ‘뽀뽀’를 했다. 문 대통령이 환하게 웃었다. 그날 밤 당선이 확실시된 시점이었다. 문 대통령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당선 축하행사 무대를 찾았을 때 벌어진 일이다. <월스트리트저널> 1면과 로이터 통신 등 해외 언론이 이 장면을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경선 당시 경쟁 상대였던 안 지사는 이 자리에서 “5년 동안 꾸준히 지지해달라. 문재인 정부는 우리 모두의 정부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
문재인 후보가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광화문광장 무대에 등장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축하의 의미로 볼에 뽀뽀를 했다.
역시 경선에서 경쟁했던 이재명 성남시장과 최성 고양시장, 지난 1월과 2월에 각각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박원순 서울시장·김부겸 의원도 새 정부의 성공을 기원하며 “문재인”을 연호했다. 현장에 모인 지지자들은 문 대통령뿐 아니라 한때 그와 후보직을 두고 경쟁했던 이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추미애 대표까지 일곱 명이 함께 손을 잡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플래시를 켠 스마트폰을 들고 흔들었다. 문 대통령의 대표적인 유세 퍼포먼스이자, 지난해 겨울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빼놓지 않고 했던 퍼포먼스다.

촛불이 만든 조기 대선이었고, 촛불 민심이 탄생시킨 대통령이었다.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자 촛불이 타올랐다. 정치권이 머뭇거릴 때 촛불이 대통령 탄핵을 견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5·9 대선이 끝났다. <한겨레>가 ‘K스포츠재단 이사장이 최순실 단골 마사지센터장’이라는 보도를 1면에 낸 2016년 9월20일부터 5·9 대선까지 232일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해 9월9일로 돌아가보자. 박근혜 정부가 실정을 거듭했지만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는 여전했다. 당시 한국갤럽의 정기조사를 보면 각 당의 지지율은 새누리당 34%, 더불어민주당 24%, 국민의당 11%였다. 이날 발표된 대선 주자 지지율은 반기문 27%, 문재인 18%, 안철수 8%였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주자 1위였다. 이때만 해도 야권이 대선에서 이기려면 후보 단일화밖에 방법이 없어 보였다.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한겨레>가 최순실씨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언론의 특종 보도가 잇따랐다. 10월24일 JTBC의 ‘태블릿 PC’ 보도는 결정타였다. 태블릿 PC 속 자료는 아무 권한이 없는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고 국정에 개입한 ‘증거’였다.

10월24일은 운명의 날이었다. 이날 오전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 개헌 추진’ 카드를 꺼내들었다. 취임 이후 ‘개헌 블랙홀’론을 내세우면서 개헌에 부정적이었는데 태도를 확 바꾼 것이다. 표현 그대로 ‘개헌 블랙홀’로 우병우·최순실 의혹을 덮고 국면을 전환하려는 의도였다. 정략적 제안이었지만 정치권이 술렁였다. 하지만 이날 저녁 ‘태블릿 PC’ 보도로 위기 모면용 ‘깜짝 개헌 카드’는 물거품이 되었다.

다음 날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연설, 홍보물 등에서 최씨의 도움을 받은 적은 있지만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는 식으로 잡아뗐다. 11월2일에는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총리로 지명하며 또 한번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그 직전에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10월29일 1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때만 해도 주최 측 추산 3만명에 머물렀다. 그런데 2주 뒤인 11월12일 전국 촛불집회에 100만명이 모였다. 박근혜·새누리당 지지도는 급락했다. 11월4일 한국갤럽 발표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5%였다. 탄핵되는 날까지 국정 지지도는 4~5%를 헤어나지 못했다. 새누리당도 마찬가지였다. 더불어민주당 지지도가 31%, 새누리당 18%, 국민의당 13%로 급변했다. 11월4일 박 대통령은 2차 대국민 담화에서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다”라며 검찰 조사, 특검 수사 수용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말뿐이었고 이후에도 수사에 응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에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4개월 동안 연인원 1700만명이 촛불을 들었다.

ⓒ시사IN 이명익
최성 고양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김부겸 의원, 문재인 대통령, 안희정 충남도지사, 박원순 서울시장, 추미애 대표가 양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왼쪽부터).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2월9일까지 정치 지형이 요동쳤다. 11월22일 남경필·김용태 탈당을 신호탄으로 보수 정당이 사실상 첫 분당을 겪게 되었다. 광장의 분노와 달리 정치권은 더딘 모습을 보였다. 촛불이 국회를 압박했다. 12월9일 ‘찬성 234, 반대 56, 기권 2, 무효 7, 불참 1’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2017년 1월 초까지만 해도 문재인 후보의 지지도는 20%대로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권 예비 주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하락세를 보여 20% 지지도를 보였다. 두 사람의 지지도가 엇비슷한 즈음에 촛불집회 현장에서 ‘사이다’ 발언으로 이재명 성남시장 지지도가 급등하며 추격해왔다. 12월9일 기준으로 문재인 20%, 반기문 20%, 이재명 18% 선이었다. 촛불 시위 초기에는 이재명 성남시장이 최대 수혜자로 꼽혔다. 그러다가 1월 중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1월13일 조사에서 문재인 31%, 반기문 20%, 이재명 12%였다. 문재인 후보의 지지도가 상승하고 이재명 시장의 지지도가 하락했다. 민주당 지지층 선호도가 바뀌며 ‘문재인 대세론’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대선까지 문재인 1위는 변하지 않았다.

촛불 이후 문재인 후보에게 도전장을 내민 유력 경쟁자는 몇 차례 바뀌었다. 문 후보의 지지율은 안정적이었고 다른 후보들은 정치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박근혜 게이트 이전에 가장 유력한 ‘여권 주자’였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반풍’은 해프닝에 그쳤다. 반 전 총장은 1월12일 귀국해 ‘1일 1구설’로 자충수를 두었다. ‘반반 행보’ ‘오락가락 행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고, 지지율은 좀체 상승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21일 만인 2월1일 그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당정치에 대한 이해가 없고 대선 준비가 부족했던 한 명망가 후보는 그렇게 무대에서 내려갔다. 반 전 총장을 중심축에 두고서 정치권에 나돌던 ‘제3지대 반문 연대론’도 이때부터 시들해졌다. 반기문 전 총장이 떠난 자리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잠시 반짝했으나 이는 애초 실현 가능성이 희미한 선택지였다. ‘출마하니 안 하니’ 점치는 언론 보도가 잠시 황 대행의 지지도를 자극했을 따름이다.

‘반풍’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중보·보수의 표심이 안희정 충남도지사로 향했다. 2월17일 안희정 지사의 지지도는 22%로 최고치에 이르렀다(문재인 후보는 33%). 중도 확장성을 무기로 상승세를 보였지만 뒷심이 달렸다. ‘대연정’ ‘선의’ 논란을 겪으며 ‘문재인 대세론’을 넘어서지 못했다.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 이후 본격화한 민주당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안희정·이재명 후보를 압도적으로 제쳤다(4월3일 누적 득표율:문재인 57%, 안희정 21.5%, 이재명 21.2%, 최성 0.3%).


다섯 개 정당의 후보가 결정된 4월 초 이후 선거판은 다시 격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3월 하순까지 7~10%대에 머물렀던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치솟으면서부터다. 반기문 불출마 선언 이후에 머물 곳을 찾아 떠돌던 보수 표심이 4월3일 안희정 지사가 민주당 경선에서 탈락하자 이번에는 안 후보에게로 향한 것이다. 4월7일 문재인 38%, 안철수 35%였고, 4월14일 조사에서는 문재인 40%, 안철수 37%를 찍었다. 5자 구도에서의 ‘양강’이었다. 갑작스러운 안철수 후보의 부상에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적폐 청산’ 기조에 변화를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논쟁이 일었다. 복기해보면 이때가 문 후보에게 대선 앞 마지막 고비였다.

하지만 이런 양강 구도는 두 주 만에 끝났다. 4월17일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한 이후 안철수 후보의 중도·보수층 지지율이 눈에 띄게 하락했다. 안 후보의 실수가 겹쳤다. 예를 들어 안철수 후보의 ‘단설 유치원 발언’이 크게 논란이 되었다.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은 안철수 후보의 지지도를 까먹는 데 결정적 작용을 했다. ‘내가 갑철수냐’ ‘내가 MB 아바타냐’ 하는 안 후보의 토론 발언은 역풍을 일으켰다. 이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4월28일 한국갤럽이 텔레비전 토론에 대한 유권자 반응을 발표했는데, ‘토론을 잘했다’ ‘토론 전보다 좋아졌다’는 질문에서 안 후보가 가장 낮은 점수를 얻었다. ‘토론 전보다 나빠졌다’는 질문에서 안 후보를 꼽는 이가 가장 많았다.

안철수 후보는 30% 후반까지 지지율을 끌어올렸지만 그게 끝이었다. 호남 유권자와 영남·보수 성향 유권자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딜레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막판에 안 후보에 대한 보수층의 지지가 빠져나갔다. 이탈한 보수층의 표심이 이번에는 홍준표 후보에게 옮아붙었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1월 촛불 때부터 꾸준히 세를 불려 대선 전에 38~41% 지지도를 유지했던 문재인 후보가 5월9일 대선에서 41.1%로 무난하게 당선했다(홍준표 24.0%, 안철수 21.4%, 유승민 6.8%, 심상정 6.2%). 그는 ‘촛불 대통령’이었다.

‘당선 확실시’ 때 세월호 유가족부터 만나

5월9일 밤 11시45분. 문재인 대통령은 경찰 오토바이의 경호를 받으며 은회색 차를 타고 서울 광화문광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15분 먼저 도착해 노란 옷을 입고 두 줄로 서서 자신을 기다리던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났다. 전명선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을 비롯한 유가족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했다.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당선이 확실시된 이후 첫 공식 일정이었다.

ⓒ노컷TV 화면 갈무리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에 온 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과 만났다.

무대에 올라 두 손을 높이 들어올린 문 대통령의 가슴에는 노란 리본이 두 개 달려 있었다. 왼쪽에는 늘 달고 다니던 노란 리본 배지가, 오른쪽에는 이날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털실로 직접 만들어 달아준 큰 노란 리본이 달렸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직접 만든 노란 나비 모양의 고리와 ‘문재인 대통령님! 당선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쓴 종이도 함께 건넸다. 문 대통령은 건네받은 노란 나비를 손에 꼭 쥐었다. 2014년 8월 광화문광장에서 ‘유민 아빠’ 김영오씨와 함께 열흘간 동조 단식을 했던 한 정치인은 2017년 5월9일 밤에 대통령에 당선돼 다시 그곳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났다. 전임 대통령한테 끝까지 외면당했던 유가족들은 새 대통령이 떠난 뒤에도 광화문광장에 남아 개표방송을 지켜봤다. ‘당선 확정’을 확인한 뒤인 새벽 2시45분께 세월호 유가족들은 안산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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