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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를 제 물건처럼 돌려쓴 독재자

2017년 05월 17일(수) 제505호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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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2월5일 공수부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이 타고 있던 C123이 제주 상공에서 사라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를 위해 악천후에 무리하게 투입됐다가 사고를 당했다. 전두환은 유감 표명을 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지난 2월5일 35주기 추모식에서 유족들이 분향하고 있다.
전두환이 처음 별을 단 건 1973년이었어. 별을 달았지만 보직은 그대로였지. 제1공수특전여단장이었어. 그래서일까 공수부대를 무척 신뢰했던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적이 아닌 자국의 국민들을 때려잡기 위한 임무에 공수부대를 투입했지. 자신의 경호에도 공수특전단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어. 오늘은 공수부대원들 가운데 전두환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인생의 대부분을 빼앗겨버린 이들의 이야기를 역시 그들의 목소리에 실어 들려주려고 해.

1982년 2월5일 출동 명령이 떨어졌소. 전두환 대통령이 2월6일 제주공항 신활주로 건설 준공식에 참석한다는 거였지요. 온 제주에 비상이 걸리고 제주 지역의 군관민이 총출동해서 쓸고 닦고 장식하고 각을 잡았다오. 대통령 외곽 경호를 담당하던 우리도 하던 대로 장비 챙기고 옷을 다려 입고 검은 베레모 쓰고 C123 수송기에 올라탔소. 그런데 우리는 제주 땅을 밟지 못했지. 당시 제주공항은 악천후 속이었소. 아니 출발지인 성남공항도 마찬가지였지요. 눈이 계속 내려서 성남 서울공항 통제국은 모든 항공기 이륙을 통제했고 제5전술 공수비행단에서도 C123의 이륙이 불가하다는 보고를 두 번씩이나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륙이 안 된답니다!’ 하고 사령관이나 기타 책임자에게 보고했던 장교는, 이런 호령을 들었을 거요. “안 되면 되게 해 이 자식아. 각하가 가신다는데.” 작전명 봉황새. 우리는 봉황을 수행하는 뱁새들처럼 눈 내리는 활주로를 날아올랐소.  
ⓒ서재철
1982년 2월5일 제주도 한라산 계곡에 추락한 C123 수송기.

그날 오후 C123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소. 군함들과 비행기들이 바다를 뒤졌지만 잔해는 나타나지 않았지. 다음 날, 군은 한 대학 등반대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제보를 듣게 됩니다. “등반 훈련 중인데 모 지점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어요.” 그 소리 속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지르던 비명도 포함돼 있었을 거요.

마침내 2월6일 오후 4시께 한라산 해발 1060m 지점에서 우리가 탄 C123 기체가 발견되었소. 그 안에 타고 있던 공수부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은 몰사했습니다. 우리가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사람, 전두환은 제주를 떠날 무렵에야 분향소에 들렀고 짤막한 한마디를 남겼소. “이번 사건은 조종사 착각으로 일어난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그 말을 들으면서 영혼의 처지로도 벌떡 일어나 그 턱을 걷어차고 싶었지. 최소한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 유감의 뜻이라도 표명해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오. 거기다가 공군도, 비행단도 무리라는 일을 억지로 하게 한 사람들의 책임은 어디로 가고 ‘인명은 재천’이라니.

우리도 우리지만, 졸지에 자식과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전두환의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신체 강건하고 사자도 때려잡을 것 같던 장정들이 왜 그렇게 속절없이 죽어가야 했는지, 누가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으로 우리를 몰아붙인 건지 밝혀야 할 거 아니오. 때는 서슬 푸른 5공화국, 정부가 신문의 기사와 방송 뉴스 순서까지 ‘보도지침’을 내리며 통제하던 시기였지. 수십명이 죽었지만 언론의 관심은 단신 하나로 끝났소. 우리 사고는 ‘군사상 기밀’로 취급됐거든.

참사 소식이 알려진 2월7일, 정확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은 채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하자 일부 유가족들이 부대 상황실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소. 유리창을 깬 이는 세 살과 돌 된 아이의 엄마였지. 남편의 죽음을 밝히는 자료라면 뭐든 손에 쥐고 싶었던 그녀가 피투성이 손으로 움켜쥔 것은 상황일지였소. 거기에는 황망한 기록이 있었지. 사고 다음 날 아침 8시45분, 그러니까 사고 기체가 발견되기도 전 박희도 공수특전사령관이 해당 부대 대대장에게 이런 명령을 보낸 거요. “훈련명칭 변경-금번 훈련은 특별 동계 훈련으로 호칭하니 전 장병에게 주지시키기 바람.” 즉 대통령 경호 작전인 ‘봉황새 작전’을 대간첩 ‘특별 동계 훈련’으로 호칭하겠다는 얘기였지. 53명의 대한민국 정예 병사들은 대통령 경호를 위해 출동한 게 아니라 ‘특별 동계 훈련’을 위해 공군의 반대와 공항의 통제에도 떠났다는 거요. 전두환에 대해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군바리(그들을 어찌 군인이라 하겠소)’들의 농간이었지. 이래 놓고 인명이 재천이라.

그렇게 우리는 죽었소. 창창한 젊음과 희망, 한창 사랑이 꽃피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웃음이 나올 아이들을 두고 우리는 ‘특별 동계 훈련’ 중에 온몸이 산산조각 나서 죽었지. 죽음이 흔한 시절이었소. 1980년 광주에서 우리 공수부대원들은 같은 사람의 야욕 때문에 시민들을 죽였고, 또 시민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요. 그중 죽지는 않았으되 제대로 살지 못했고 살았으되 평생을 절망에 허덕인 우리 동료 얘기를 잠깐 덧대보겠소.

ⓒMBC화면 갈무리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 김동관씨(오른쪽).
김씨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원이었다.
“'서!’ 그래서 안 서면 그냥 쏴버렸어”

1979년 5월 군 입대를 했다가 3공수여단에 차출된 젊은이가 있었어요. 이름은 김동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77학번이었소. 그런데 그는 공수부대원으로서 1980년 5월 광주에 군홧발을 찍게 되지. 그때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은 악랄한 쪽으로 대단했지. 김동관은 그 참극 앞에서 정신을 놓아버렸소. 총격전 와중에서도 총을 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을 사냥하듯 쏴 죽인 하사관들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도 벌였다고 하더군.

“명령은 데모대 중에서 무장한 경우에만 사격을 하게 돼 있었어. (그런데) 얘들, 특전사 요원 애들은 무차별 사격했다고, 무차별로. 내가 그걸 봤어.” 눈앞에서 자기 동료들이 사람을 오리처럼 쏘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또 총을 맞았지만 그래도 살아서 심장이 뛰던 시위대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전남대 뒷산 나무 아래에 두고 발걸음을 옮기며 그의 정신은 시나브로 망가져갔지요. 복학을 했지만 자신이 체험했던 지옥을 잊지 못했고 행복하게 살자고 하면 자신의 동료들이 파괴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평화와 생명의 기억이 그 발목을 잡아챘지. “‘서!’ 그래서 안 서면 그냥 쏴버렸어. 무장을 했건 안 했건. 무서워서 도망가면 그걸 쏴 죽였어. 이 특전사 애들이. 그러니, 무차별 학살이지 무차별 학살….”

그는 술로 세월을 보냈고 술에 취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도졌지. 불현듯 일상 사이로 끼어드는 지옥의 악몽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는 평생 정신병원을 전전해야 했지. “그때 전두환을 죽여야 되고 노태우도 죽여야 되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 매일매일 생각하면 술이 안 끊어지는 거야 술이. 슬퍼서… 복수를 해야겠다고 불타는 게 아니라 슬퍼서. 그들의 죽음이 슬퍼서.”

우리가 대통령 경호할 때 청와대에 있었던 ‘영애’가 쫓겨나고 새 대통령이 뽑혔다는 소리 여기까지 들립니다. 그 와중에 우리 공수부대를 제 물건처럼 이리저리 돌려쓰고 제 경호원으로, 시민의 학살자로 만들었던 독재자가 여전히 살아서 활개를 치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치가 떨리게 됩니다. 참 그런 사람이 아직 살아서 “광주 사태는 폭동”이라고 뇌까리고 있다는 소식에 그가 우리 분향소에서 했다는 말을 아프게 되씹게 돼요. “그래, 인명은 재천이구나. 참 하늘은 얄궂고 짓궂고 험상궂고 심술궂구나.” 또다시 5·18이군요. 정권교체 환호 속에 들뜨더라도 잊지 말아주시오. 정신없더라도 챙길 건 챙겨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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