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던 후배였다. 유학 생활 중 농구를 하다 쓰러졌다고 했다. 치료받으러 왔다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힘겨운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겨냈다. 퇴원 후 집 근처에서 만났다. 후배는 무균실 생활을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얼마나 아팠을지 짐작이 갔다. 이젠 다 괜찮아졌다고 믿어 마음을 놓았다.  

몇 달 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발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그가 스물여덟 살이던 2013년 10월의 일이다. 또래의 가까운 이를 저세상으로 보낸 일이 익숙지 않아 한동안 헛헛했다. 당시 일기에는 이렇게 썼다. ‘명복을 비는 것도, 저세상에서는 아프지 말라는 말도, 감히 못하겠다. 종종 널 떠올리며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겠다는 되뇜만이 네 젊은 영혼과 어울릴 거 같다.’ 한 달여 지나 그 친구의 부모가 조문 왔던 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받았다. “저희는 늘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힘든 일, 어려운 일조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계속 그렇게 생각하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가 이렇게 얘기하는데, 감히 슬프고 허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후배의 이야기가 새삼 언론에 오르내린다. 아버지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로 이름을 올려서다. 김동연 후보자는 아들 투병을 위해 골수 이식을 한 날도 주변에 알리지 않은 채 휴가를 썼다. 아들을 떠나보낸 날에도 출근해 원전 대책을 지시했다. 사사롭기 그지없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 치하 꼿꼿한 공직자로서 그의 모습이 재조명되고 있다. 내 눈길을 더 끈 건 김 후보자가 2014년 5월 언론사에 기고한 글이다. “(병원으로 가는) 혜화역 3번 출구에는 아직도 다시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가족 중에 누군가 아파야 한다면 엄마, 아빠나 동생이 아니라 자기인 것이 다행’이라고 했던 큰애 때문이다”라는 구절을 읽다 결국 눈물을 흘렸다.

다시 마음을 다독이며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아픔을 세월호 유가족에게 투영한 김 후보자 덕분이었다. “그분들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를 드리고 싶다. 그렇게 할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 말 않고 그저 따뜻한 허그(hug)를 해드리고 싶다.” 개인의 아픔이 자기에게만 머물지 않고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그 마음이, 다시 공직을 수행하는 곳곳에서 발현되길 기대한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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