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코너에서 여러 번 얘기한 바 있다만 6월 항쟁은 마치 드라마처럼 우리 곁으로 왔단다. 1986년 10월 말,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집회에서 평소와 달리 경찰은 학생들의 진입을 막지 않았고 학생들은 멋도 모르고 건국대에 집결해 집회를 열었어. 그런데 별안간 경찰은 건국대를 포위하고 농성하는 학생들을 진압한 뒤 무려 1288명을 구속해버렸단다. 정부는 이를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으로 어마어마하게 뻥튀기했고, 국민이 학생들을 지켜보는 눈은 그만큼 차가워졌지. 데모 나가면 시민들이 발을 걸어 넘어뜨려 경찰에 넘기는 일까지 있었다니까. 바로 그 시점에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을 받던 중 죽었단다. 이 죽음을 둘러싸고 있었던 일들은 여러 번 얘기했을 테니 되풀이하지 않으마. 다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차 자신들을 다스리던 정권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어찌나 사악하게 거짓말을 해왔는지, 또 비열하게 그 권력을 이어가려 하는지 깨닫게 됐지. 그리고 광주항쟁 이후 7년 동안 왜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전두환의 득의양양한 철벽을 향해 몸을 던져 머리가 깨져나가며 싸웠는지 깨닫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거야.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더 이상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1987년 6월10일 아빠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밤 10시30분까지 자율학습을 해야 했지. 그러나 아빠는 이튿날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교통편이 끊겨 수 킬로미터를 걸어갈 수밖에 없었거든. 그날 아빠는 시위대와 전경들의 대오를 일곱 번쯤은 가로질러야 했어. 그만큼 시위대가 곳곳에 형성돼 있었고 경찰들은 무지막지하게 밀려드는 시위대에 기가 질린 듯 보였다. 학생들만이 아니었어.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함께 있었고, 그들은 운동가요가 아닌 익숙한 노래를 가사만 바꿔 부르며 함께 어울렸지. “새 나라의 대통령은 대머리가 아닙니다. 대머리가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전국의 대머리 여러분께는 죄송한 이야기이고, 그 대열 속에도 대머리는 많았다만 그들은 ‘대머리 대통령(전두환)’을 야유하며 함께 웃고 떠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어. 〈9시 뉴스〉 시간만 되면 맨 먼저 등장해 그 동정을 국민이 강제로 알아야 했던, ‘본인은’으로 시작하는 그 쉰 목소리의 장본인은 대머리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있었어. 이제 한국 사람들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무녀리들이 아니게 된 거야.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은 끝없이 몰려나왔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나오듯 잡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경찰은 버스 한가득 태운 학생들을 교외에 내려놓기도 했지. 버려진 학생들은 또 모여서 데모를 벌였어. 전국의 도시는 시위를 응원하는 경적 소리와 함성, 그리고 외신기자들이 “후일 이 피해는 유전병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할 만큼 시민들이 난사된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썼다.
“모두 함께 싸우자. 누가 나와 함께하나, 저 너머 장벽 지나서 오래 누릴 세상.”
시내 한복판에서 가게를 하시던 네 할머니는 데모하다가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받아들이고 쫓아온 경찰의 코앞에서 셔터를 내려버리셨다. 고층빌딩에서는 최루탄을 닦으라는 휴지가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렸어. “이래서야 어떻게 장사를 하겠느냐”라는 한 상인의 푸념에, “무슨 소리냐. 그런 소리 할 것 같으면 네가 여기를 떠나라”고 이웃 상인들이 한목소리로 핀잔을 주었지. 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학생들을 보다 못한 승용차 운전자들은 차에서 기름을 빼주었다. “이걸로 화염병을 만들어요.” 본의 아니게 서울 명동성당에 갇혀버린 학생들을 위해 담장 옆에 있던 계성여중 학생들은 자신들의 점심 도시락을 모아주었고 넥타이 맨 직장인들이 박수를 치고 최루탄 쏘지 말라고 외치며 경찰에 맞서게 됐지. 공권력이 명동성당에 진입하겠다고 통보하자 가톨릭의 최고 수장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경찰은 맨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신부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다음으로 수녀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을 밟고 넘어선 뒤에야 학생들을 보게 될 것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경찰의 호통에 어깨 움츠리고 데모하는 학생들 때문에 나라가 소란할까 두려워하던 소심한 국민들은 역사의 주인공들로 완전히 탈바꿈해 있었어.
“심장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서울의 명동성당은 부산의 ‘논스톱 시위’로 이어졌어. 항도 부산 시민들은 그 화끈함을 과시하면서 사흘 연속 밤샘 시위를 벌였어. 비가 와도 우산을 들고 시위했고 고층빌딩에서 소파를 집어던지며 저항했다. 부산의 공권력은 마비 상태에 빠졌고, KBS와 시청 정도만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버티는 지경에 이르렀지. 마침내 전두환은 또 한 번 군대를 동원할 생각을 해. 이 소문이 퍼지자 각 운동단체 구성원들은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단다. “잡혀가도 거리에서 잡혀가겠다.”
“잡혀가도 거리에서 잡혀가겠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가로막은 존재들이 있었단다. 전두환이 필생의 업적으로 준비한 88 서울올림픽도 그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전두환의 발목을 잡아챈 것은 바로 그해로부터 7년 전의 광주였어.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전국에 계엄을 펴고 공수부대를 투입했을 때 유일하게 일어서서 저항했고 전두환의 독수(毒手)를 피로 받아내야 했던 광주. 그 참혹한 기억은 전두환의 심복들에게도 동요를 일으키게 했어. “또 우리 손에 피를 묻히라고요?”
꼭 기억하렴. 만약 광주가 없었다면, 1980년에 전두환이 아무 기탄없이 정권을 잡았고 그 와중에 광주시민들의 거룩한 저항이 없었다면 아마 전두환은 거리낌 없이 시민들 앞에 공수부대를 들이밀었을 거야. 서울 종로, 부산 서면, 대구 동성로, 대전 으능정이는 피로 뒤덮였을 거야. 그 참혹함을 막았던 건 홀로 봉기하고 외롭게 싸우고 참담하게 죽어간 광주 사람들의 용기였단다.
본격적인 6월 항쟁 하루 전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학생은 한 달여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끝내 숨을 거뒀어. 연세대 교정에서 치러진 장례식에서 민주화 운동의 원로라 할 문익환 목사님이 연단에 오르셨지. 그분은 연설 대신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1970~1980년대 한국을 지배한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이었어. 전태일부터 이한열까지 무려 26명. 광주의 희생처럼 우리 역사의 디딤돌이 된 이름들이었지. 문익환 목사의 절규에 실린 이름들을 들으며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울었어. 역사의 깊은 잠을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렸던 이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은 또 꺽꺽거리고 울었다. 너도 들어봤을 노래 ‘그날이 오면’은 문익환 목사가 처음으로 부른 이름, 노동자 전태일에게 바친 추모곡이었지. 그 후렴구다.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앞으로 문익환 목사님이 목 놓아 불렀던 이름 가운데 몇 분의 이야기를 전해주려 해. 잘 들어주기 바란다. 우리 역사의 심장 고동 소리로 남은 그분들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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