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그림책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좋아하는 그림책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그림책입니다. 알고 보면 행복의 기준도 저마다 취향의 문제입니다. 때로는 단지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림책을 펼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펼친 그림책이 저를 더 강렬하게 매료시키기도 합니다. 그렇게 발견하는 반전의 매력은 거의 충격적입니다. 저에게는 재클린 우드슨이 쓰고 E. B. 루이스가 그린 〈친절한 행동〉(나무상자, 2016)이 그런 작품입니다. 또한 오늘 이야기하는 그림책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가 그렇습니다.

표지에는 로쿠베로 짐작되는 강아지 한 마리가 얌전하게 있습니다. 다리를 워낙 뭉툭하게 표현해서 앉은 건지 서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란색이 로쿠베를 조명처럼 비추고 있고, 로쿠베는 어딘가 위를 보고 있는데 그 앞에 마주 서 있는 것이 나무인지 담인지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로쿠베는 무엇을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할까요?

사실 강아지 로쿠베는 깊은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구덩이가 얼마나 깊은지 로쿠베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로쿠베가 짖는 소리만 들립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소리만 들어도 로쿠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쓰오가 집에서 손전등을 가져와 비추자 로쿠베가 보입니다. 아이들은 로쿠베에게 힘내라고 외치고 로쿠베는 멍멍 짖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들은 로쿠베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형들은 아직 학교에서 오지 않았고 아빠들은 모두 일터로 갔습니다. 이제 어린아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구덩이에 빠진 강아지 로쿠베를 구할 수 있을까요?

한국 독자에게 더 가슴 먹먹한 작품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의 책장을 넘기던 독자들은 곧 씁쓸함과 불쾌함과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로쿠베를 구하기 힘든 이유는 어린이들이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어른들의 무관심과 생명 경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구덩이에서 로쿠베를 구하는 일은 남자들이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어른들을 데려오지 않습니다. 어떤 아저씨는 구덩이에 빠진 게 사람이 아니라 개라서 다행이라며 가버립니다. 이렇게 어른들이 로쿠베를 도와주지 않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합니다.

위기에 처한 생명을 외면하면서 어른들은 어쩜 그렇게 무덤덤하고 당당할까요? 과연 위기에 처한 생명이 자기 아이여도 그랬을까요? 자기 강아지여도 그랬을까요?

구덩이 밖에는 다섯 어린이가 있습니다. 구덩이 안에는 로쿠베가 있고요. 하지만 배경은 구덩이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로쿠베를 구할 때까지 어린이들은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는 단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아주 단조롭고 연극적인 작품입니다. 초 신타의 그림이 독자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주인공들이 계속 나오는데 지루하기는커녕 흥미진진합니다. 초 신타가 이 단조로운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든 방법은 캐릭터들의 표정 연기입니다.

주인공 로쿠베의 감정 연기는 단연 최고입니다. 더불어 밖에서 기다리는 어린이들의 간절한 표정 변화는 로쿠베와 어린이들의 마음을 끈끈하게 이어줍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 구덩이는 슬프고도 아름답습니다. 초 신타는 구덩이를 로쿠베의 슬픔을 담아내는 아름다운 그릇으로 표현했습니다.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를 보는 한국 독자들의 가슴은 더욱 먹먹합니다. 세월호의 기억이 가슴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우리 아이이고, 세상의 모든 동물 친구가 우리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어린이가 어른을 구원합니다.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간절하게 사랑할 때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됩니다. 어린이들은 말합니다. “어른들아, 조금만 기다려! 우리가 구해줄게.”

기자명 이루리 (작가∙북극곰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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