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많은 국민이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다. 평화시위가 제도 정치권에 압력을 가하고 부패한 대통령을 합법적 절차를 통해 권좌에서 쫓아냈다. 대한민국 국민은 세계를 향해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줬다. 어찌 자랑스럽고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당선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언행도 돋보였다. 특히 지난 역사와 정권 속에서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각별했다. 당선 당일, 그는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손을 맞잡았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희생자 가족에게 먼저 다가가 포옹을 했다. 소위 지도자가 그처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나는 최근의 변화를 보면서 ‘억하심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표출할 때, 무슨 심정으로 그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뭔가 마음에 맺힌 것이 있다고 여겨질 때, 쓰는 말이다.

우리는 대통령의 언행을 보면서 억하심정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억하심정의 뿌리가 생각보다 깊고 멀리 뻗어 있다면? 어떤 이에게는 일생에 걸쳐 쌓인 것이라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세대에 걸쳐 쌓인 것이라면?

내가 종사하는 사회학은 억하심정의 사회적 원인과 해법을 따지는 학문이다. 2013년 한국불평등연구회가 주최한 학술행사에서 논문 한 편이 발표됐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 사회학과의 임채윤 교수와 김근태 연구원이 작성한 논문에 따르면 한국은 “일상에서 타인으로부터 존중받는다”라는 느낌에서 세계 최하위권이었다.

특히 한국인은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타인에게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가난하게 사는 것도 힘든데 사람대접 받기도 힘든 것이다. 한국의 경제적 불평등은 심각하다. 더 심각한 건 경제적 불평등이 사람다움의 자격과 권리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에 비해 임금만 적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조직에서 동등한 구성원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의사 결정에 적극 참여할 수 없다. 극단적인 예도 있다. 그들은 직원 연수에 참석하지 못한다. 운동회에서 정규직이 축구를 하면 그들은 족구를 한다. 비정규직용 의자와 정규직용 의자는 다르다. 물론 후자가 더 좋다.

한국은 민주주의의 모범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결집하여 평화적으로 권력을 교체하는 시민적 역량을 보여줬다. 그런데 정작 그 위대한 시민들은 일상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 지위와 직급이 낮은 사람, 인종과 성적 정체성이 다른 사람을 향해 어떤 언행을 보이는가?
 

ⓒ연합뉴스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의 노룩패스로 한국의 ‘개저씨’라는 말이 국제적으로 회자되었다.

 

한국의 가부장주의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외신에서 ‘개저씨(gaejeossi)’는 ‘권위적 한국 남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한국이 밖으로 어떻게 보이나 하는 애국적 염려는 잠시 접어두자. 혹여 내 자신이 타인의 억하심정을 부추기는 원인은 아닌지, 그것을 덜어주려는 의지가 과연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자.

친절함이나 자상함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문제다

대통령의 언행이 사람들의 억하심정을 일말이라도 풀어줬다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다만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리더십과 근사한 중장년 ‘남자 사람’의 이미지를 보여줘서 귀하고 또 고맙게 느껴진다면, 참으로 서글프다. 하루하루 삶 속에서 억하심정을 풀어주는 이는 우리가 함께 일하고 생활을 나누는 사람이지 미디어 속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의 억하심정을 풀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고용과 교육과 복지에 관해 약속했던 정책의 실행이다. 권력의 남용과 오용으로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한 사건들에 대한 진실 규명이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감시와 독려가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일이 있다.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의 비율이 바뀌기 전에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일터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기. 조직과 집단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원칙을 잊지 않기. 그간 쌓인 서로의 억하심정을 헤아리고 풀기 위해 노력하기.

오해할까 봐 덧붙인다. 나는 지금까지 친절함이나 자상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나는 민주주의를, 자유와 평등의 실천을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의 현장은 결국 삶이니까.

기자명 심보선 (시인·경희사이버대학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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