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슈너 폭탄’이 심상치 않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끊임없이 괴롭혀온 러시아 게이트의 ‘몸통’으로, 그의 사위이자 백악관 선임고문인 재러드 쿠슈너가 급부상했다. 최근 중동과 유럽 순방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은 귀국 직후 백악관 밖의 지인과 변호사들에게 전화를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게이트 수사와 관련한 극도의 불안감 때문이다. 지난 대선 당시 트럼프 캠프와 러시아 간 내통 의혹을 파헤치기 위해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까지 임명된 상황이다.

트럼프의 실세 사위인 쿠슈너가 러시아 커넥션의 몸통으로 떠오른 결정적 계기는 〈워싱턴포스트〉의 특종 보도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쿠슈너는 대선 한 달 뒤인 지난해 12월 초 뉴욕의 트럼프타워에서 세르게이 키슬랴크 주미 러시아 대사를 만났다. 당시 쿠슈너는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트럼프 대통령 인수위원회 멤버였다. 그 자리에는 대선 당시 트럼프의 안보고문으로 초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마이클 플린 장군도 있었다. 러시아 측에선 키슬랴크 대사 외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으로 통하는 실세 금융인 세르게이 고르코프 러시아 국영 대외경제개발은행(VEB) 은행장이 나왔다. 〈워싱턴포스트〉가 키슬랴크 대사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쿠슈너가 충격적인 발언을 내놓았다. 주미 러시아 대사관 혹은 영사관의 통신시설을 이용해 트럼프 인수위원회 측과 러시아 정부 간에 비밀 채널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미국 내 러시아 외교관들의 동태와 통신을 면밀히 추적하는 연방수사국(FBI)은 물론 대외 감청을 담당하는 국가안보국(NSA)도 쿠슈너의 발언을 파악했다. 〈워싱턴포스트〉 측은 지난해 12월 중순, 익명의 제보자를 통해 관련 내용을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안이 확실한 미국 정부의 통신시설이 아니라 러시아 측 시설을 통한 비밀 채널 구축을 제안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AFP PHOTO5월24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미국·이탈리아 정상회담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오른쪽).

공식적으로는 한낱 인수위 멤버에 지나지 않는 민간인 쿠슈너가 무슨 이유로 푸틴 대통령의 실세 측근인 고르코프를 만난 것일까? FBI도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조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는 ‘몇 년째 지속되는 시리아 내전의 종식 방안’ ‘러시아 군부와의 채널 구축’ 등이 회동의 의제였다고 보도했다.


FBI는 양측이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를 논의했는지 조사 중이다. 2014년 미국 정부는 크림 반도를 강제 합병한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발동한 바 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하순 취임 직후 대통령 행정명령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 해제를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가 제재 해제령을 내렸다면 가장 반길 사람은 다름 아닌 고르코프다. 고르코프는 국영 대외경제개발은행 은행장으로 미국의 제재 때문에 미국 금융기관과 거래가 끊기면서 영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고르코프는 자신과 쿠슈너 간의 회동이 폭로되자 “당시 만남은 유럽과 아시아, 미국 내 영향력 있는 금융기관과 사업 확대를 논의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라고 주장했다. 쿠슈너는, 고르코프가 만난 여러 미국 업계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문제의 인물’ 고르코프는 누구인가

하지만 고르코프의 이력을 보면 순전히 사업 목적으로 쿠슈너를 만났다는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르코프는 경제인이라기보다 정치인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가 은행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국영 대외경제개발은행의 이사진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 등 러시아의 저명 정치인으로 채워져 있다. 고르코프는 푸틴과 개인적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 정보기관과도 밀접히 연계된 인물이다. 심지어 러시아 정보기관이 미국에서 첩보 네트워크를 가동하는 비용도 이 은행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르코프는 러시아 스파이 양성소로 알려진 연방보안청(FSB) 군사학교 출신이다.

자신을 둘러싼 의혹이 증폭되고 있지만 정작 쿠슈너는 평소와 다름없이 백악관 선임고문직을 수행하고 있다. 쿠슈너는 러시아 게이트와 관련한 FBI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정치평론가로 예일 대학 정치학자인 월터 샤피로는 최근 영국 〈가디언〉 기고문에서 “쿠슈너가 공개적으로는 당당한 모습을 보일지 모르지만 앞으로 아내 이방카와 자녀들보다는 개인 변호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 같다. 향후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그의 삶은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느긋한 쿠슈너에 비해 트럼프는 초조해 보인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수사에 대한 트럼프의 강박증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 순방에서 귀국하자마자 백악관 비서진에 대한 인적 개편을 시작한 것은 이런 강박증을 시사한다. 트럼프는 러시아 게이트 보도에 백악관 공보 라인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며 불만이 적지 않았다. 인적 쇄신의 첫 대상은 백악관 공보국장 마이클 덥키였다. 덥키는 대선 시절 비주류였던 트럼프에 맞서 주류 후보들을 옹호하는 광고회사를 이끌던 인물이다. 트럼프와 악연이었는데 숀 스펜서 백악관 대변인 추천으로 지난 2월 공보국장에 취임해 대언론 메시지 업무를 담당해왔다. 결국 그는 취임 3개월 만에 경질됐다.

그러나 후임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러시아 게이트로 트럼프와 측근들이 줄줄이 엮이면서 백악관은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이 덥키 공보국장 후임으로 4명과 접촉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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