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인권 경찰’로 거듭나겠다며 잇달아 개선 방안을 내놓고 있다. 경찰 수사권 독립의 전제 조건 중 하나인 경찰의 인권침해적 요소가 방지되어야 한다는 청와대 발표가 있은 후부터다. 이런 움직임을 보면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할 때의 한 사건이 떠올랐다.

2010년 5월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경찰이 피의자를 고문했다는 진정이 제기되었다. 서울시내 한 경찰서에서 경찰관이 피의자에게 범행을 자백하라며 입에 재갈을 물리고 스카치테이프로 얼굴을 감은 후 폭행했다는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이후 수사 현장에서 더 이상 고문은 없다고 경찰 스스로 자부하고 국민도 그렇게 믿던 시절이었다. 비슷한 고문을 당했다는 피해자가 무려 22명이나 되었다.

인권위는 곧 직권조사에 착수했다. 베테랑 조사관 9명이 약 20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사를 벌였는데, 그 결과가 놀라웠다. 심한 구타는 기본이고, 수건이나 휴지로 입에 재갈을 물린 뒤 머리를 짓밟았다. 수갑을 뒤로 채운 채 팔을 꺾어 올리는 소위 ‘날개꺾기’를 하고 방석에 머리를 눌러 질식사 직전 상태까지 몰아가기도 했다. 게다가 가해 경찰관들은 이 같은 고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경찰서 내 CCTV의 각도를 조절해 사각지대를 만들고 그곳에서 고문을 자행했다. 피해자들의 허벅지에는 피멍이 들었고 팔꿈치 뼈가 골절됐다. 재갈 물기를 거부한 한 피해자는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아 이가 깨지거나 빠지기도 했다.

결국 고문에 가담했던 경찰관 5명은 검찰 수사를 거쳐 모두 파면되었다. 이들을 지휘한 간부 5명도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

경찰에서 고문의 망령이 되살아났다는 충격 때문이었을까. 그때 상황은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글을 준비하면서 혹시 내 기억이 틀린 것은 아닐까 싶어 당시 자료들을 뒤적거리다 흥미로운 자료 하나를 발견했다.

고문 사건에 대해 인권위가 권고를 하고 석 달 뒤. 당시 조현오 경찰청장이 인권위를 방문해 “‘인권 경찰’의 글로벌 스탠더드 확립을 위해 양 기관 간 정례적인 워크숍, 인권 실태 합동점검 등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하기로 한다”라고 말한 경찰청의 보도 자료였다. 조 청장은 또한 “그간 경찰 편의적인 집회·시위 제한, 무차별 일제 검문검색 등 경찰권 행사를 국민의 입장에서 재검토하고 인권위 권고사항을 수용한 인권침해 종합 방지대책을 마련한 뒤 강도 높게 추진할 것”이라는 계획도 밝혔다.

최근 경찰이 발표하는 인권 대책을 보면서 오래된 레코드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옛 노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옛 노래를 빛바랜 보도 자료를 통해 직접 확인하니 더욱 기분이 씁쓸했다. 비슷한 ‘인권 경찰’ 타령은 2012년에도 발표된 바 있다. 당시 김기용 경찰청장은 전국 250개 경찰서를 인권 중심의 경찰서로 바꿔가겠다는 선언을 했다.
 

ⓒ박남춘 의원실 제공경찰청이 박남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민중총궐기 집회 당시 충남 9호 살수차가 백남기 농민(버스 앞 파란 옷 입은 이)에게 물대포를 쏘기 직전 상황.

 

하지만 그동안 국민이 목도한 경찰의 모습은 보도 자료 내용이나 경찰청장의 선언과는 거리가 많이 먼 듯하다. 가깝게는 2015년 11월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결국 사망했다. 2014년 밀양송전탑 행정대집행 때는 할머니 10여 명을 경찰 3000명이 둘러쌌고 결국 노인 두 분이 목숨을 끊는 비극을 낳았다.

인권침해 상담 건수, 교도소에 이어 경찰이 2위

인권위가 설립된 2001년부터 2016년 11월까지 경찰과 관련된 인권침해 상담 건수는 무려 2만4000여 건에 달한다. 전체 상담 건수의 21.1%나 되며, 교도소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경찰은 최근 집회·시위 현장에 살수차를 배치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름도 참되게 물을 사용한다는 ‘참수리차’로 바꾸겠다고 했다. 경찰의 직무집행과 관련해서는 ‘인권영향평가’를 도입하고, 피의자 조사 시 영상을 의무적으로 녹화하는 방안도 강구 중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호응은 여전히 시원찮은 것 같다. 그동안 어디 한두 번 속았냐는 불신의 더께가 국민들 가슴속에 여러 겹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수차를 참수리차로 이름을 바꾸겠다고 하는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번에는 정말로 ‘인권 경찰’로 나아가기 위한 확실한 자기 쇄신이 있어야 국민의 신뢰를 얻고 수사권 독립이라는 염원도 앞당겨 현실화될 것이다.

기자명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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