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은 유난히 낮이 길었다. 이듬해 서울올림픽을 위해 전두환 정권이 5월부터 ‘서머타임’을 시행했다. 긴 낮 동안 벌어진 사건들이 한 시대를 끝냈다. 500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거리로 나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6·10 민주항쟁(6월항쟁)의 대미를 장식한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는 100만명이 참석했다. 건국 이래 최대인 이 기록은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까지 29년간 깨지지 않았다.

그해 거리에 나선 500만명 중 김영삼·노무현·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었다(당시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여서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국회에 들어간 사람도 많았다. 더러는 그 과정에서 “변절했다”라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생생한 증언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1987년 6월24일 서울 중구 소공동 한국은행 앞에서 ‘직선제 민주개헌을 실시하라’며 구호를 외치던 시민을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박춘애

“내 인생은 시민들이 지켜줬다”

학교 축제가 끝나고 시험이 다가오는 1987년 6월 중순이었다. 반독재 운동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전남대 비상시국총회는 6월16일 총학생회장과 투쟁위원장의 삭발식을 결정했다. 총여학생회장이었던 내가 “그걸로는 좀 약하지 않아? 나도 같이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했다. 모두가 말렸다. 머리카락을 깎아 시위한다는 게 흔치 않은 시절이었고, 특히 여학생은 더 그랬다. “이 마당에 안 될 게 뭐가 있어?”라고 대꾸했다. 그날 오후 2시 나는 중앙도서관 앞 5·18민주광장에 앉았다. 시위 때마다 입었던 옥색 저고리와 검정색 치마를 입었다.

의식의 힘이란 무섭다. 긴 생머리가 가위로 잘리자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머리카락을 깎아준 예비역 후배들과 총여학생회 사람들은 내내 울었다. 머리카락이 다 잘리자 군중 속에서 20명 이상이 뛰쳐나와 이어서 삭발을 했다. 몇몇은 옷을 찢었고, 즉석에서 혈서를 쓰는 이도 있었다. 그 힘을 모아 교문 밖으로 나가 거리 시위를 벌였다. 그날 이후 광주 학생들의 시위 참여 인원은 크게 늘었다. 여대생 한 명이 머리를 깎아 광주의 6월에 불을 붙인 셈이 되었다.

사실 내가 총여학생회장이 된 계기를 돌아보면 조금 멋쩍다. 선배들의 권유로 출마했는데, 특별히 사명감이 투철하거나 운동권 주요 인물이어서는 아니었다. 학생회 임원으로 출마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 학점을 받아야 했다. 학생회 안에는 그 ‘요건’을 갖춘 사람이 드물었다. 학생회 임원이 된다는 건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애인과 의논하자 고맙게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할 수밖에 없지”라고 말했다. 그가 지금의 남편이다.

ⓒ시사IN 이명익전남대 총여학생회장이던 박춘애씨(아래)는 30년 전, 독재 반대를 주장하며 긴 생머리를 잘랐다. 전국 최초의 여대생 삭발이었다.

인터넷이나 SNS가 없던 시절이라 집회 시간과 장소를 알리기 어려웠다. “시민 여러분, 지금 여기로 모여주십시오! 집회합니다!”라고 소리치고 다녔다. 내가 사복 경찰에게 붙들리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사람들(사수조)도 따로 있었다. 경찰들이 나를 잡아가려 들면 옆에 있던 사수조 학생들이 대치하다가 대신 잡혀갔다. 나는 시위 당일 나를 보호하려는 사수조가 누구였는지 모른다. 훗날 “제가 그날 회장님을 보호했습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진짜 6월항쟁의 주역이다.


6·29 선언 이후 수배가 해제됐다. 사범대 학생이었기에 1989년 졸업하고 바로 교사로 발령이 났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설립됐다.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발령 4개월 만에 해직됐다. 전국 최초 삭발 여대생에 이어, 전국 최연소 해직 전교조 교사가 되었다. 1994년 복직까지 5년간이 어땠는지 부모는 모른다. 휴직하고 다른 일을 한다고 둘러댔다. 더 상처를 줄 수 없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세월호 3년상을 치르는 광주시민상주모임’에 참여했다. 지난 4월16일까지 3년 동안 날마다 출근길에 피켓을 들고 거리 선전을 했다.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나와서 길거리를 다녔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종이학 1000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며, 스스로 노란 배 1000척을 접었다. 전원 구조가 자기들 소원이라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도 크지만, ‘광주’로 묶이는 자부심과 공감대가 있다.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대학 학생처도 마찬가지였다. 총여학생회장이 된 뒤 학생처장이 해남 고향집에 찾아가 “당신 딸이 운동권 주모자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우리 딸이 앞장서서 하는 일이 절대 나쁜 짓일 리 없다”라고. 학생처장은 나한테 “당신 아버지 정말 훌륭한 분이다”라고 말했다.

6월항쟁의 최대 수혜자는 나다. 내 인생은 시민들이 지켜줬다. 삭발할 때만 해도 ‘그래, 내가 이렇게 하다가 죽어도 어쩔 수 없네’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내 뒤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울면서 머리카락을 자르던 학생회 후배들. 따라서 삭발을 하고 혈서를 쓰던 처음 보는 학우들. 나를 대신해 기꺼이 경찰에 잡혀간 이름 모를 학생들. 거리에 나와 함께 구호를 외친 광주 시민들. 전교조에 가입해 해직될 때도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나를 응원했고, 세월호 피켓을 들 때도 격려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져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박근혜 정권하에서 6월항쟁 30주년을 맞았다면 얼마나 참담했을까. 우리 모두가 살아온 삶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면서…. 촛불혁명 이후 30주년 기념식을 하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6월10일 광주·전남 6월항쟁 기념식 사회를 맡게 되었다. 30년 전에 입었던 옥색 저고리와 검정색 치마가 아직 몸에 맞았다. 1987년 그때처럼 나가서 떠들었다. 돌이켜보면 30년간 나는 늘 뭔가 해보려고 했다. 할 일이 자꾸 생긴다. 결정의 순간마다 정면 돌파해왔다. 피하지 않았고 잔머리 굴리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다.

김학규

“30년 전 더 잘했어야 하는데…”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대학에 갔는데, 들어가서 보니 세상이 내 생각과 좀 많이 달랐다. 군사정권이 광주에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선배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역사는 붓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거야.” ‘한 10년 투자해서 세상부터 바꾸고 공부하자’고 생각했다. 계획이 틀어져 여기까지 왔다.

종철이와는 서울대 84학번 동기다. 종철이는 전공이 언어학이고, 나는 국사학과였다. 같은 인문대학 소속이라 운동조직 안에서 서로 연관된 일을 맡았다. 종철이는 ‘타이핑 팀’ 팀장이었다. 누구나 워드프로세서를 쓰던 시절이 아니었다. 유인물 하나 만드는 데에는 값비싼 타자기와 전문 인력이 필요했다. 종철이가 그 일을 총괄했다. 나 같은 사람은 몸으로 뛰었다. 타이핑 팀에서 쳐온 문건을 종철이가 전해주면 우리 팀 사람들은 밤새 등사기(서류를 복사하는 데 쓰인 일종의 간이 인쇄기)로 밀었다. 유인물을 많이 뽑아낸 새벽에는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종철이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1986년 10월 하순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날도 종철이가 문건을 타이핑해서 국사학과 사무실에 주고 갔는데, 내가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 친구를 불렀다. 이야기하려던 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친구의 얼굴만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맑은 눈빛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사IN 조남진김학규씨(아래)는 ‘10년 정도 투자해서 세상부터 바꾸자’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박종철 열사의 눈을 떠올리면 ‘운동은 평생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1986년 11월 초부터는 내가 수배를 당해 도피하느라 종철이를 만날 수 없었다. 1987년 1월15일 우연히 밖에 나가 석간신문을 샀다. 늘 그랬듯, 집회나 검거 소식이 실린 사회면을 먼저 펼쳤다. 그 신문에 내 친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죽었다고. 기사에는 ‘쇼크사’라고 쓰였는데, ‘고문받다가 죽었다’라고 읽혔다. 두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하나는 친구를 앗아간 정권에 대한 분노, 다른 하나는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공포. 오랫동안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이상한 감정이 내 몸을 지배했다.


다른 학생들과 만나서 종철이 이야기를 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사실 우리도 조금 이상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큰 충격과 실의에 빠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건을 당연시했다. 인권에 초점을 맞춰 정권을 규탄하기보다는 ‘하필 내 친구가 걸렸구나’ 하는 울분만 앞섰다. 비일비재하게 이런 일을 접해온 우리는 ‘고문사’ 소식 앞에 일반인들보다 담담했을 수 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는 구호를, 우리가 더 일찍 외쳤더라면 6월항쟁을 앞당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88년 5월 붙잡혀 감옥에서 6개월을 살다가 나왔다. 노태우 정권이 유화정책을 펴던 때라, 우습게도 감옥에서 나온 지 2주 만에 복권됐다. 1989년 학교에 복학을 신청했는데 학교 측이 “당신은 휴학이 아니라 제적됐다”라고 하더라. 1987년부터 학교에 아예 못 갔으니 미등록 제적 처리된 것이다. 시대 분위기가 운동권 학생들에게 친화적이라 복적 신청을 하니 바로 받아줬다. 한 학기 장학금도 받았다. 복적하고도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못했다. 노동청년운동을 했다. 이후 6월항쟁 1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에서 사무국장 비슷한 직책을 맡았고, 20주년까지 이 일을 했다. 스무 살에 세운 10년짜리 계획은 이렇게 바뀌었다.

이번 촛불항쟁에 참여하면서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다. 30년 전 우리가 더 잘했어야 하는데…. 6·29 선언이라는 당황스러운 대응이 기만책이라는 문제 제기가 분명 있었지만, 돌파해내지 못했다. ‘87년 체제’라는 타협적 시스템하에 30년이 흘렀다. 군사정권을 완전히 몰아냈다면 아마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이런 비용을 치르지 않고도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않았을까?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서 나는 박종철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고민한다. 좁게 말하면 타인과의 신의다. 물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선배가 어디에 있는지 불지 않았다. 말할 수도 있었는데, 그랬으면 종철이는 살았을 수도 있는데. 의미를 더 확장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다. 종철이의 신의는, 단순히 한 선배가 아니라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선 운동조직을 향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박종철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마다 박종철인권상을 시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고 백남기씨, 올해는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수상했다.

종철이가 끌려간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청 인권센터가 되었다. 그가 죽은 509호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박종철 기념관도 여기 있다. 운영 주체가 경찰청이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다. 시민사회가 운영하면서, 민주화 희생자 모두를 추모하는 곳으로 바꾸면 좋겠다. 대공분실 건물 입구에는 한여름에도 바람이 쌩쌩 부는 공간이 있다. 고문을 끝낸 경찰들이 시원하게 쉬라고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종종 여기 앉아서 종철이의 눈을 떠올리면, ‘정말 운동은 평생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명준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 손으로”

1947년에 태어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싸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느라 1년 늦게 졸업했다. 이후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우리 학과는 수십명 규모였는데 청강생이 많아 수업에는 수백명이 드나들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1969년 학내에서 박정희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하는 동안 학우들은 구경만 하더라. 일찌감치 제적당한 터라 그때가 몇 학년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사IN 조남진이명준씨(위)는 “6월항쟁의 교훈이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도 발휘됐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고문은 예사였다. 나 역시 경찰에 잡혀가 기절할 때까지 물고문을 당하곤 했다. 고문이 아침에 시작됐는데, 깨어나 보면 창밖은 캄캄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지병인 천식이 악화됐고, 뇌출혈이 와서 2주간 의식불명으로 입원한 적도 있다. 아직도 매일 아침 약을 챙겨 먹는다. 종손이었던 내가 대학도 늦게 가고 그마저도 제적당하자 집안사람들은 “패가망신의 원흉”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사면복권이 된 뒤인 1997년쯤에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74년 명동성당 이기정 수석보좌신부에게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해 지학순 주교가 구속당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창립되고 활동이 어느 정도 겹쳤다. 바깥에서 운동권 사람들을 만나기 살벌한 시절이었다. 이기정 신부를 설득해 사제관에서 사람들과 모임을 가졌다. 전부터 사제관에 자주 드나들던 젊은 명동성당 신자들과 의기투합했다. 1975년 5·22 사건(김상진 열사 추모집회), 같은 해 명동성당 7인 위원회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연루됐다.

1986년 함세웅 신부를 따라 필리핀에 갔다. 때마침 터진 필리핀 6월 혁명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독재자 마르코스에 대항해 100만명 이상이 거리로 나왔는데도 미국은 군을 투입하지 않았다. ‘제3세계 민주화운동에 대해 군사력으로 누르지 않는다’는, 미국의 저강도 전쟁 정책을 알게 됐다. 이런 추세라면 우리도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봤다.

예상대로 전두환의 1987년 4·13 호헌 선언 이후 한국에서도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됐다. 4월21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들이 단식을 시작했다. 서울대교구, 안동교구에서도 동참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였던 나는 시민들이 스스로 ‘의식화’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신부들의 단식으로 주일 미사가 취소되자 신자들이 난리가 난 것이다. 명동성당을 둘러싼 신자들이 외친 ‘평범한’ 구호가 인상적이었다.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 손으로”였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에 천주교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좌우와 양김(김대중·김영삼)을 넘어, 사회 각 단위의 힘이 결합된 조직이 필요하다고 봤다. 개신교 쪽과 불교 쪽도 공식·비공식으로 꾸준히 만났다.

성유보·황인성·김도현과 함께 ‘6·10 국민대회 행동요강’을 작성했다. 우리는 비폭력을 누차 강조했다.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 손괴 등을 자행하는 사람은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세력으로 규정한다’는 대목도 넣었다. 당일 명동성당 앞에서 화염병을 만드는 학생들에게 따로 당부하기도 했다. “여기는 경찰도 없는데 화염병을 어디에 던질 생각인가? 시위가 격렬해지면 시민들은 빠진다. 운동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필리핀의 사례를 보고 평화 집회여야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6월항쟁의 교훈이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도 발휘됐다고 생각한다. 촛불집회 초창기 원로회의에 나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는 탄핵돼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여의도를 통해서다. 실탄을 맞으면서 권력자를 끌어내리는 혁명은 틀렸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운동은, 번번이 그런 식으로 실패해왔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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