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저서 〈남자 마음 설명서〉에 드러난 다채로운 여성혐오 관점에 대하여 문제가 제기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여기는 것 같지만, 페미니스트들은 괜한 사람이나 괴롭히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여성은 이미 ‘촛불’ 이전부터 이 국가가 여성을 온전한 구성원으로 여기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왔다. 이 물음은 정권이 바뀐 지금까지도 여전히 계속된다.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에서 근무하는 행정관은 명실공히 공인이다. 대선 기간 가장 뜨거웠던 스캔들 중 하나가 다름 아닌 홍준표 후보의 ‘약물 강간미수 사건’ 회고였음을 떠올려본다면, 이것은 충분히 공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일이다. 이 사건에서 더 큰 웃음이나 음악으로 보답할 길 같은 것은 없다. 납득할 만한 해명과 조치가 있거나, 그가 더 이상 공인이 아니게 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나도 모르게 설명당해버린 마음의 억울함도 달랠 겸, 나 역시 다른 버전의 설명을 시도해보려 한다. 〈남자 마음 설명서〉의 표지에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럼 선각자를 따라서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남자들이 두려워하는 여자는 따로 있다!” 누구인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욕망하고 일하고 말하고 쓰면서, 나에게는 관심 없는 여자. 다름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여자이다.

ⓒ정켈 그림

오늘날 가부장제의 기능은 바로 여성 주체를 끊임없이 방해하는 일이다. 사회제도·법·관습·지식·문화 등 사회 전반에 암약하면서, 여성들을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위치에 잡아두려 한다. 그것은 때로 물리적인 폭력이기도 하고, 세련되고 문명화된 투명한 장벽이기도 하다. 여성의 삶을 끊임없이 생물학적 성별로 환원하고, 그 성별을 궁극적인 제한이자 천형으로 여기도록 하려는 장치들의 총합이다.  


많은 경우 가부장제는 남자에게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남성 개개인은 가부장제의 창조자나 담지자가 아니다. 다만 가부장제가 남성 일반에게 선사하는 유리한 조건들을 당연하게 여길 뿐이다. 여기에 더해 가부장제하의 남성은 여성을 보상이나 전리품으로 인식하도록 교육받는다. 삶에서 특정한 수준의 성취를 해낸다면, 그 성취에 맞는 여성이 자연스럽게 주어질 것이라는 식이다. 이런 인식은 여러 가지 효과를 낳는다.

여성이라는 생물학적·사회적 존재에 대한 무지를 이어나가는 것을 용인한다. 여성을 외모라는 ‘기준’과 성교와 돌봄이라는 두 가지 ‘기능’으로 단순화하여 그에 대한 집단적 환상을 갖게 한다. 상대의 환심을 사고 마음을 얻는 과정이 증발하고 모종의 빚쟁이 같은 마음이 관계의 기본이 된다.

여자들이 잘못된 페미니즘에 경도되어 남자를 혐오한다?

하지만 환상은 사회에 발을 딛자마자 깨진다. 여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경쟁자로 나타난다. 더 많은 제약과 악조건에도 남성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 남자들은 당황한다. 가부장제의 온실 속에서 곱게 자라난 남성성이 감당하기에 오늘날의 세태는 너무 거세다. 뭐가 문제인지 고민하던 이들이 얻은 답변은 가히 최악의 것이다. 여자들이 문제다. 세계는 여성혐오 같은 거 하나도 없고, 평화롭고, 정상적인데, 여자들이 잘못된 페미니즘에 경도되어 남자를 혐오하는 게 문제라는 얘기다. 어느 누리꾼은 이 자가당착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세상에 여혐이 어딨어? 여혐이라고 하면 죽여버린다!?”

이 작고 깨지기 쉬운 남자의 마음을 단련시켜야 한다. 정 어렵다면 하루에 세 번씩 외쳐보자. “여자도 사람이다.” 이 문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기자명 최태섭 (문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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