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좋은 영화’입니까?” 자주 듣는 질문. 자주 이렇게 답하는 나. “영화평론가가 답할 문제네요. 전 영화 애호가일 뿐인걸요.” 그러고는 질문을 바꿔 다시 물어주길 청한다. 이렇게 말이다. “이 영화는 ‘좋아하는 영화’입니까?”

비슷하게 들리지만 둘은 전혀 다른 질문이다. ‘좋은’ 영화인지 답하기 위해선 시종 ‘영화’를 탐구해야 하지만, ‘좋아하는’ 영화인지 답하려다 보면 결국 ‘나’를 탐문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이 영화를 좋아할까? 이 영화의 어떤 면이 내 마음을 움직인 걸까? 내 삶의 어떤 궤적이, 내 안의 어떤 결핍이, 내 마음속 어떤 바람이 나를 이 영화에 공명하게 만든 걸까? 그렇게 따라오는 고요한 자문자답의 시간이야말로 영화 애호의 진짜 즐거움. 폼 나는 ‘평론가’ 직함을 고사하며 고작 ‘애호가’를 자처하는 이유.

〈지랄발광 17세〉(원제는 〈The Edge Of Seventeen〉)가 좋은 영화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미국 내 평론가들의 비평을 종합해 평점을 매기는 유명 웹사이트 ‘로튼토마토닷컴’에서 95% 지지를 받고 있다(6월21일 현재). 평론가 100명 가운데 95명 비율로 엄지손가락을 세웠다면 웬만해선 좋은 영화일 수밖에 없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놓고 마지막까지 겨룬 두 작품 〈라라랜드〉와 〈문라이트〉의 지지율이 각각 93%와 98%이므로, 그 두 편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좋은 영화라고 말해도 괜한 억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단지 ‘좋은 영화’이기만 했다면 굳이, 내가, 지금, 여기 소개할 이유가 없다. 〈지랄발광 17세〉는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척, 매우, 아주, 많이, 정말 좋아한다. 나는 왜 이 영화를 좋아할까? 이 영화의 어떤 면이 내 마음을 움직인 걸까? 내 어린 날의 어떤 궤적이, 내 열일곱 살의 어떤 결핍이, 내 학창 시절의 어떤 바람이 나를 이 영화에 공명하게 만든 걸까? 일주일째 이어지고 있는 자문자답의 시간이 심지어 평소처럼 고요하지도 않다. 재잘재잘, 내 안의 열일곱 살이 혼자 묻고 답한다. 티격태격, 그 시절에 대한 상반된 기억들이 서로 다툰다. 토닥토닥, 영화 속 네이딘(헤일리 스테인펠드)과 닮은 예전의 나를 지금의 내가 다독이고 위로한다.


모두들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성적은 시원찮고, 성격도 모났으면서, 성애(性愛)에 대한 관심만은 유별난 열일곱 살 주인공(내가 그랬는데!). 세상 모든 일에 짜증내며 살고 있는 네이딘에게 가장 짜증나는 일은 “죽을 때까지 나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나도 그랬다고!). 부모도 선생도 그 누구도 내 편이 되어줄 것 같지 않아서, 언제까지나 내 편으로 남아줄 것만 같은 단짝 친구에게 모든 걸 걸었다(완전 내 얘기잖아!). 하지만 친구는, 세상은,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뭐 하나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다(맞아, 그렇다니까!).

흐릿했던 열일곱 살의 기억이 금세 또렷해지며 이내 영화와 함께 울고 웃던 나는, 문득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을 떠올렸다. “어린이 문학은,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하고 아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입니다(〈책으로 가는 문〉(현암사) 중에서).” 그게 어디 어린이 문학만의 일이겠는가. 응원이 필요한 게 어디 아이들뿐이겠는가. 〈지랄발광 17세〉는 ‘모두들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하고 관객을 힘껏 응원하는 영화다. 아주 재밌는 코미디 영화이자 정말 잘 만든 성장영화다. 이미 ‘좋은 영화’이면서 이제 곧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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