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9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기자간담회가 이례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의 재벌 개혁 구상이 발표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소액주주운동을 주도하면서 ‘재벌 저격수’라는 별명까지 얻은 인물이다. 재야에서 축적한 이론과 경험이 실전(實戰)에는 어떻게 반영될까? 재벌 대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에 대한 급진적 개혁안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날 김상조 위원장은 재벌 소유·지배구조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고 “재벌 개혁은 일회적인 몰아치기식 개혁이 돼선 안 된다”라며, 4대 그룹과 만나겠다고 말했다. “소통을 통해 대기업집단이 사회와 시장이 기대하는 바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기 위해서다.

개혁론자들이 지적하는 재벌 대기업집단의 고질적 문제는 ‘소유와 지배의 괴리’다. 재벌의 총수 일가는 그룹에 대해 절대적 지배권(경영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실제로 소유한 지분은 전체 계열사 주식 가운데 5% 내외에 불과하다. ‘5% 소유자’가 ‘100%(전체 계열사)’를 지배하는 비결은, 재벌의 총수 일가가 지배하는 계열사가 다른 계열사의 지분을 갖고(출자), 그 계열사는 또 다른 계열사를 소유(출자)하는 식으로 ‘소유·지배의 사슬’을 구축해놓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재벌 총수 일가 이외의 주주들(소수 주주)’이 피해를 본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재벌 개혁론자들은 기업 운영에서 소수 주주의 권한을 강화하고(집중투표제, 다중대표소송), 나아가 대기업집단의 사실상 해체를 겨냥하는 방안(출자총액제한제 부활, 기존 순환출자 금지 등)을 내놓고 있다.

ⓒ연합뉴스6월23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4대 그룹 정책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상조 위원장이 이 같은 개혁안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권한만으로는 소유·지배구조 개혁에 필요한 조치들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법은 물론이고 여러 금융 관련 법률을 제·개정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김 위원장의 현실주의적 면모다. 재벌로 불리는 기업집단 구조는 명암을 모두 갖고 있다. 명암 중 어느 쪽이 더 큰지도 명확히 판단하기 힘들다. 또한 재벌 개혁으로 통칭되는 소유·지배구조 개혁으로 소수 주주들 이외의 서민·노동자 계층에게 실익이 있을지도 따져봐야 한다.


예컨대 A라는 대기업이 수익금 가운데 일부로 중간재 생산업체인 B사를 설립했다고 가정하자. 가장 큰 수혜자는 총수 일가(A사를 지배)이다. 자신의 돈을 크게 투자하지 않고 B사까지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B사가 다시 A사의 주식을 사들여(순환출자), 총수 일가의 지배권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총수 일가 외의 주주들(소수 주주)은 일단 손해다. A사가 수익금을 투자하지 않고 배당금으로 돌렸다면 적잖은 금융수익을 손에 쥘 수 있었을 것이다. 재벌개혁론은 이런 짓을 못하도록 차단하자는 것이다.

다만 해당 기업집단과 국가경제 전반의 관점에서는 이런 행위가 순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 B사가 잘 발전해서 A사에 우수한 부품을 순조롭게 공급(계열사 간의 내부거래다)하는 경우다. 이른바 ‘수직계열화’인데, 삼성전자가 대표적 성공 사례다. 이 회사는 스마트폰 생산에 필요한 디스플레이, 플래시메모리, 마이크로프로세스, 카메라 등 핵심 부품을 계열사로부터 매입한다. 그 덕분에 생산 기종이 제한된 애플 등 경쟁 업체와 달리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스마트폰을 시장 수요에 맞춰 유연하고 신속하게 출시하면서 글로벌 1위 업체로 떠오를 수 있었다. 중간재를 외부 업체에서 조달한다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었다. 또한 이런 수직계열화는 A사의 경쟁력과 매출, 주가까지 올린다. A사 소수 주주들의 손익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A사가 중간재를 글로벌 중간재 시장에서 조달하지 않고 굳이 국내에 기업을 설립했기 때문에 창출된 일자리는 ‘재벌의 적폐’인가?

다만 위의 사례에는 ‘함정’이 있다. B사의 대주주가 ‘총수의 아들’인 경우다. B사는 A사의 주문으로 창업 초기부터 우량한 영업실적을 기록할 수 있다. 상장하면 주가가 액면가의 수십 배 수준으로 형성된다. 부친이 경영하는 A사 덕분에, B사의 대주주인 아들은 손 짚고 헤엄치기식 경영으로 엄청난 금융 수익을 거둘 수 있다. 기업집단 구조를 활용한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이며, ‘부당’ 내부거래다. 또한 B사만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기업에겐 아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불공정 거래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 발동

김상조 위원장은 현실의 이런 복합적 측면들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소유·지배구조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현실 시장에서 자행하는 불공정 거래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를 이미 발동 중이다.

ⓒ연합뉴스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사익 편취와 관련해 집중·직권 조사 중인 공정위는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을 고발했다.

공정위는 45개 대기업집단의 내부거래 자료를 받아 분석 중인데, 이 가운데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가 의심되는 경우에는 강력한 집중·직권 조사를 시행하기로 했다. 이미 부영그룹의 이중근 회장이 고발당했다. 이 회장은 사실상 부영의 계열사인 친척 소유 기업을 계열사로 신고하지 않은 혐의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의 대상에서 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도, 지금의 ‘총수 일가 지분 30% 이상인 상장사’에서 ‘20% 이상’으로 크게 확대한다. 삼성·현대차·SK·한화 등의 주요 계열사가 줄줄이 규제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의 ‘갑질’에 대한 규제도 강화된다. 현대차 그룹의 소유·지배구조에서 핵심 기업인 현대모비스는 최근 ‘거래상 지위 남용’ 혐의로 공정위 심사를 받고 있다. 현대모비스는 전국적으로 1600개에 달하는 대리점에 판매 목표를 강요하고 물량을 떠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대형 유통업체에 대해서도 불공정 거래로 적발되는 경우, 과징금 부과 기준율을 현행 30~70%에서 60~140%로 2배 인상하는 내용의 ‘대규모 유통업법 과징금 고시 개정안’을 행정 예고했다.

김상조 위원장의 이런 방침에 대해 벌써 ‘재벌 편으로 돌아섰다’ 등의 비난이 나온다. 그러나 그는 공정거래위원장이 되기 전부터 대기업집단에 대한 현실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와 청문회 등에서 “(기업 지배구조는) 정답이 없으며 진화 과정의 문제”라거나, 재벌 개혁론자들의 주장인 ‘기존 순환출자 금지’에 대해서도 “시급한 주요 현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출자총액제한제 부활에도 부정적 견해를 명확히 했다. 대기업집단의 지주회사 형태로의 전환에도 긍정적이며 이에 따라 ‘자사주 규제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볼 때 김상조 위원장은 대기업집단 문제를 적어도 ‘기업집단 해체 및 총수 일가 몰락’의 관점에서 처리해나갈 의향은 없는 듯하다. 김 위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도 “신중하고, 합리적이며, 지속 가능하고, 그러면서 후퇴하지 않는 개혁을 추진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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