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중남미는 낯설다. 한국인들은 중남미를 친숙한 북아메리카나 유럽과는 달리 특유의 역사와 사회·경제 제도를 가진 ‘먼 대륙’으로 생각한다. 이런 남아메리카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코드’ 중 하나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을 꼽는다. 베네수엘라는 한때 남아메리카의 지도적 국가로 부상했다가 급격히 추락해버린, 극과 극을 경험한 나라다. 차베스에 대한 찬양과 경멸이 엇갈린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논쟁의 중심이다.

1989년 2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버스 회사들이 요금을 100% 인상하면서 군중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는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중남미 현대 정치가 중 가장 문제적 인물은 단연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다. 그가 정치가로 활약한 기간은 1999년부터 2013년까지 햇수로 치면 15년이다. 처음 얻은 공직이 대통령이었고, 사망하는 순간에도 대통령이었다. 이 기간에 차베스는 베네수엘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뉴스메이커였다. 살아서도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죽어서도 여전히 논란의 한복판에 있다.

차베스의 정치 인생은 온갖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군인인데 좌파였다. 좌파인데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에 실패했는데,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이 된다. 또한 포퓰리스트였다. 포퓰리스트인데 혁명가였다. 차베스는 “2021년까지 해보자!”라며 권력욕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지만, 세계 정치사상 최초로 대통령 소환투표를 신설하고 직접 실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대놓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지만, 일당체제를 도입하지도 시장경제를 폐지하지도 않았다. 미국을 향해 “엿 같은 양키”라고 독설을 퍼부었지만, 미국과의 무역은 늘 순조로웠다.

통치 스타일도 독특했다. 그에게 정치는 권투경기 같았다. 다부진 외모의 차베스는 직접 정치의 링 위에 올랐다. 상대를 놀리고 어르고 도발해 팽팽한 대결을 벌이면서, 관중도 자극해 차베스타(chavista:차베스 지지자)와 안티 차베스타(antichavista)로 나누어놓았다. 애당초 통합의 정치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으며, 시종일관 기득권층과 대결하는 정치를 추구했다.

정치학자들조차 차베스 정부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포스트모던 독재”, 스티븐 레비츠키는 “경쟁적 권위주의”로 보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비자유민주주의”로 분석했다. 강조점은 저마다 다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차베스 정부는 우리가 아는 독재와 다르고, 민주주의와도 다르다는 점이다.

차베스는 데뷔부터 요란했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그를 처음 본 것은 1992년 2월4일이었다. 이날 오전 10시30분 ‘쿠데타 주동자’ 차베스가 텔레비전에 나왔다. 쿠데타에 실패한 데다 동료들에게 투항 명령을 내려야 하는 궁색한 처지인데도 “베네수엘라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는 예의 바른 인사로 말문을 여는 빨간 베레모의 남자. 그는 “비록 지금은 실패했지만 베네수엘라가 더 나은 길로 나가야 한다”라는 주장을 했다. 쿠데타 실패의 모든 책임을 온전히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말로 마무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중령 5명이 이끈 쿠데타는 완전히 실패작이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1분 남짓의 방송 출연은 ‘주동자’ 우고 차베스의 운명을 180° 바꿔놓았다. 쿠데타 다음 날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90%가 이 실패한 주동자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는 수도 카라카스의 빈민지역에서 일약 영웅이 되었다.

좌파인데 쿠데타, 포퓰리스트인데 혁명가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실패한 쿠데타 지도자에게 이토록 호의를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베네수엘라 국민, 특히 빈민들이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는 1960~1970년대만 해도 ‘민주주의의 진열장’이라 불리며 보기 드물게 정치 안정을 누린 나라였다. 그 안정의 비결은 연립정부였다. 당시 베네수엘라 정당 지도자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늘 연립정부를 만든다는 협약을 준수하며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이는 극우파 군인들의 쿠데타 기도를 미연에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좌파 정당의 집권을 막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베네수엘라가 냉전 시기에 보기 드물게 정치 안정을 이룬 비결은 바로 좌파 집권을 빌미로 미국이 개입하거나 군사 쿠데타가 발생할 수 있는 고리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Youtube 갈무리1992년 2월4일 쿠데타 실패 후 주동자 우고 차베스(가운데)가 텔레비전 방송을 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 베네수엘라는 중남미에서 손꼽히는 부자 나라였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중남미에서 가장 높았다. 모두 석유 덕분이었다. 1970년대에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석유 수입국들이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산유국 베네수엘라는 호황을 누렸다. 오죽하면 “사우디 베네수엘라”라는 별명까지 생겼을까. 석유는 여전히 베네수엘라 수출의 80%나 되고, 국가재정의 50%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다.

문제는 정부 투자의 편중이었다. 투자의 혜택은 대부분 중·상류층에게만 돌아갔다. 일자리도, 소득도, 공직도 모두 그들 차지였다. 복지정책도 중·상류층이 주로 혜택을 보았다. 대표적인 게 대학 무상교육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초등학교도 못 마치는 나라에서 초·중등 교육에 투자하는 대신 대학 교육을 무상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곧 베네수엘라도 주변 중남미 나라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1980년대가 되면서 유가는 곤두박질치고, 외채 금리가 치솟았다. 석유와 외채에 의존해온 베네수엘라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실업자가 늘어나고 노동자들도 이전보다 낮은 임금을 받아야 했다. 자연히 빈곤층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석유 호황기를 이끌었던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이 다시 선출된 것은 그런 위기가 위험수위에 다다른 1988년이었다. 페레스는 취임하자마자 국민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1989년 2월27일 월요일, 새 정부가 출범하고 25일이 지나서였다. 아침 출근길이 난리가 났다. 버스 회사들이 요금을 100% 인상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자에겐 하루 일당 수준의 금액이었다. 학생은 50% 할인 혜택을 누렸는데 그것도 사라졌다.

그 전날 정부가 유가를 100% 인상하겠다고 발표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승객들의 승강이는 어느새 군중 시위로 변해버렸다. 비슷한 시위가 수도 카라카스 빈민지역 곳곳에서 일어났다. 오후가 되자 폭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했다. 군대를 동원하고 발포 명령도 내렸다. 계엄군은 무장도 하지 않은 군중을 향해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다. 약 일주일간 계속된 유혈 사태 이후, 정부는 총 287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수천명이 죽었다고 믿는다. 이 폭동과 학살의 일주일은 훗날 ‘카라카스 충돌’로 불린다.

당시 군인이던 차베스는 ‘볼리바르의 저주’가 자신을 덮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주받을 군인’이라고 여긴 다른 이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0~1970년대에 흔했던 극우파의 쿠데타가 아닌, 1990년대에 일어난 좌파 군인들의 쿠데타였다. 쿠데타를 시도한 날, 차베스는 카라카스 빈민지역에서 순식간에 영웅이 되었다. 그곳이 바로 가장 많은 사람이 학살된 곳이었다.

ⓒEPA2009년 2월 중남미 이웃 나라 국가원수들과 함께 대통령 취임 10돌 기념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가운데 손 든 이).

쿠데타 실패 뒤 차베스는 26개월 만에 석방된다. 그가 감옥에 갇힌 사이 베네수엘라 정치는 숨 가쁘게 변해갔다. 차베스가 체포하려던 페레스 대통령은 1993년에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탄핵되고, 그해 말 선거에서 라파엘 칼데라가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신임 대통령은 전 정권의 경제정책 때문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그랬기에 취임한 지 두 달 만에 국민 화합 차원에서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들을 사면한 것이다.


1994년 3월26일 토요일 우고 차베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날은 부활절 주간을 앞둔 날이었다. 베네수엘라 국민은 이 시기에 모두 휴가를 떠난다. 언론과 군중의 관심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가 일부러 그날을 택한 것이다. 이날 정오, 차베스는 사관학교에 출두해 퇴역 신청서에 서명하고 감옥에서 내내 입었던 군복을 벗고 고향의 전통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정문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기자들과 군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벌써 기자회견용 탁자가 놓여 있었다.

이튿날 아침 언론은 일제히 그의 석방 기사를 실었다. “사령관은 어디로 향할까? 바로 권력을 향해!” 자, 이제 차베스는 어떻게 권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그는 군인 신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1분 남짓한 방송 출연으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난세가 만든 포퓰리스트

그에게는 네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 다시 군사행동을 벌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미 군 정보국이 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심지어 차베스의 운전사까지 매수한 상태였다. 둘째,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길이다. 노동조합 내부에 전투적인 세력도 존재했으며 차베스에게 우호적인 노동운동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전반적인 사정은 좋지 않았다. 베네수엘라노동자총연맹(CTV)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빈민을 학살한 페레스 전 대통령의 민주행동당(AD) 하부 조직에 불과했다. 셋째, 기존 좌파 정당에 들어가는 길도 있었다. 1993년 대선에서 기존 좌파는 두 갈래로 쪼개졌다. 급진대의당(LCR)의 안드레스 벨라스케스 후보가 21.95%를 기록해 좌파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나머지 세 좌파 정당인 베네수엘라공산당(PCV), 사회주의운동당(MAS), 민중선거운동(MEP)은 좌파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당선 가능성이 높은 중도우파 후보 라파엘 칼데라와 연합했다. 당시 차베스는 즉각적인 제헌의회 수립을 요구하면서 이들의 온건 노선을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차베스가 직접 대중과 소통하면서 독자적인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길이 있었다. 차베스에게는 쿠데타 당일 방송 출연에서 잠시 발휘된 적이 있는, 뛰어난 웅변술이 있었다. 유머 감각도 넘쳤다. 복잡한 일도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야구에 빗대어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차베스는 이 마지막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출소한 다음 날부터 차베스는 사흘간 카라카스 시내를 행진했다. 서부 빈민가는 물론이고 동부의 부유한 지역까지 가리지 않았다. 무수한 깃발을 들고 군중이 뒤를 따랐다. 차베스는 이후 1994년, 1995년, 1996년 전국을 순회했다.

중국에서는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지만, 중남미에선 난세가 포퓰리스트를 만든다. 한 나라가 큰 위기를 맞았는데도 정당이나 사회조직이 국민 대다수를 대변하지 못할 때, 국가기구를 비롯해 기존의 모든 제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즉 난세를 맞았을 때, 오직 카리스마적인 지도력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아웃사이더들이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 집권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1930~1950년대 중남미도 거대한 위기를 맞았다. 대공황과 세계대전에 중남미 경제 전체가 무너지던 시절이었다. 농민들은 가난과 체념 속에서 겨우 연명하고, 도시 노동자들은 빈곤과 무권리 속에 버려져 있었다. 바로 이들을 선동하며 권력 기반으로 만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도밍고 페론,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 멕시코의 라사로 카르데나스 등이 그들이었다.

차베스도 그들처럼 난세에 포퓰리스트로 집권했다. 그는 기득권 엘리트와 가난한 대중을 나누는 이분법적 수사학으로 무장하고, 6년 만에 무명의 군인에서 공화국 대통령으로 변신했다. 그 뒤에 2000년, 2006년, 2012년 대선까지 무려 4차례나 연거푸 당선되었다. 차베스는 재임 14년간 ‘볼리바르 혁명’ 혹은 ‘21세기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개혁을 추진했다. 그런데 그 개혁은 우리가 아는 사회주의 혁명이나 기존 포퓰리즘과는 뚜렷이 달랐다.

기자명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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