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김지영의 〈헬페미니스트 선언-그날 이후의 페미니즘〉(일곱번째숲, 2017)과 이현재의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들녘, 2016)은 현재 상태를 뒤흔든 하나의 공통 사건에서 출발한다. 제목과 부제에 나란히 들어가 있는 ‘이후/그 후’가 그것을 입증한다. 각기 프랑스 철학과 독일 철학을 전공한 두 저자는 2016년 5월17일 서울 강남역에서 일어난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의 자각과 궐기에 철학적 개념 도구를 지원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강남역 사건 현장에는 많은 여성이 희생자를 애도하는 글귀를 적은 형형색색의 포스트잇(post it)으로 넘쳐났다. 윤김지영은 붙이는 메모지를 뜻하는 상품명 포스트잇에서, 이전의 여성운동과는 뚜렷이 다른 ‘그 이후(=post it)’의 여성주의를 읽는다. 윤김지영은 새로 생겨난 여성주의자를 ‘헬페미니스트(Hell Feminist)’라고 명명하면서 이들의 운동을 변이체들의 비범한 혼란으로 설명하고 싶어 한다.

ⓒ이지영 그림

“5·17 페미사이드 이후의 헬페미니스트는 남성 사회의 승인을 기대한 적이 없으며, 아카데미 페미니즘에 판정을 요청한 적도 없습니다. 헬페미니스트는 좀 더 온건하게 말하면 승인받을 수 있을 것이란 환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헬조선에서 태어난 헬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교과서에 자신들이 등록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헬페미니스트는 끊임없이 사건을 발명해내는 존재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헬페미니스트는 여성혐오주의자들이 겨냥하는 지점을 끊임없이 비껴가며, 그들이 단정 짓는 그 무엇으로도 축소되거나 환원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은이는 메갈리아를 헬페미니스트 전략을 창안하고 실천한 대표적인 여성운동으로 본다. 메갈리아가 거부한 것은 ‘착한 페미니즘’이자 남성의 척도에 맞는 페미니즘이다. 메갈리아가 전시한 미러링은 남성 가부장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여성이라는 기표를 거부하고 전복하는 데 최적화된 무기였다. 이로써 메갈리아는 ‘여자 일베’라는 악명을 얻었지만 메갈리안은 사회가 부여한 여성의 자리에 머물지 않으려고 했을 뿐 아니라, 남성 사회와 공생하는 것에 강한 의문을 품었다. 실제로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여성은 남성의 억압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여성만의 분리주의적 공동체를 꿈꾸고 실험”해왔는데, 그런 실험이 메갈리아를 통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드러난 것이다. 기존의 일부 여성 운동가들과 남성 지식인들이 메갈리아와 거리를 두거나 비난하고 나선 것도 메갈리아가 가진 근원적 페미니즘 충동 때문이다.

〈헬페미니스트 선언-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일곱번째숲 펴냄

좌우 막론하고 메갈리아 죽이기에 남성이 대동단결했던 까닭은 페미니즘과 달리 남성은 유사 이래 한 번도 여성으로부터의 전적인 분리를 시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성 가부장제가 여성을 정치·사회적 권력의 정점에서는 열외로 취급하면서도 여성과 분리된 독립 공동체를 꿈꾸어보지 않은 이유는 뻔하다. “이 땅에서 주류적 남성성, 승자와 강자로서의 남성이 된다는 것은 여성이라는 최종적 식민지의 착취를 통해서만 유지 가능”하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과 분리된 공동체를 아예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가부장에 기반한 남성 사회와 공생하기를 거부한 메갈리아는 호환이나 마마보다 더 두려운 존재가 되었으며, 남성 연대에 의해 타도되어야 했다. 하지만 강남역에 붙은 포스트잇이 훼손된 즉시 금세 새로운 포스트잇으로 메워진 것처럼 메갈리아 또한 이름을 바꾸어가며 재탄생했다.


한편 이현재는 남성들의 여성혐오 기제와 5·17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여성 주체 모두를 ‘비체(卑/非體:abject)’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비체(鼻涕)란 콧물·침·분비물 등 내 몸 안에 있으면서 나의 순수성이나 정체성을 교란하고 오염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절히 관리되거나 내 몸 밖으로 방출되어야 한다. 유대인·무슬림·성 소수자·이주 노동자 등은 내 몸속의 비체가 사회적 은유로 확장된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불러낸 남성들의 여성혐오

“비체는 경계를 넘나드는, 그래서 더럽다고 여겨졌던 것이며 잡힐 수 없기에 공포스러운 것이다. 비체는 철통 방어라고 여겨졌던 경계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존재이며, 따라서 특정 사회적 질서와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자들에게 경계를 위협하는 비체는 공포를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를 여성혐오에 적용해보자. 자신을 여성과 뚜렷이 구분되는 경계를 갖는 주체, 즉 남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남성들이 있다. 이 남성들은 남성 정체성의 경계를 교란하고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여성을 오염되고 불순한 것, 공포스러운 비체로 간주하여 혐오하게 된다.”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현재 지음, 들녘 펴냄

남성 중심 사회에서 똑똑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 남자를 추월하는 여성, 결혼하지 않으려는 여성, 모성을 거부한 여성 등은 비체처럼 공포스럽고 혐오스럽다. 아니, 남성이 보기에 창녀·성녀·어머니 등으로 고정되지 않고 변환하는 여성은 그 자체로 남성을 불안하게 한다. 그래서 남성 가부장 사회는 그 질서 속에 여성을 고정해놓기 위해 명예살인이나 음핵 절제 같은 폭력을 제도화했다. 다행히도 한국에는 저런 악습이 없지만, 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은 여성혐오를 제어하지는 못했다. 재시동된 페미니즘은 여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와 자본주의 도시 문화(성취 경쟁)에 포획되지 않는 비체를 선택하고, 다양한 비체와 연대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은이는 인터넷 여초 커뮤니티의 동성애 혐오를 비판적으로 본다.


이현재의 책을 보면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 시장에서 남성뿐 아니라 여성과 경쟁하게 된 남성들이 남성성의 위기와 열등감을 느끼게 된 198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경제적 위기감 및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부터 남성들의 여성혐오가 부상했다. “위기감에 봉착한 남성들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보다, 자신의 우월성을 확보해줄 지배적 남성성을 유일한 안전장치로 활용”하면서 “물질적·제도적 변화”를 주장하는 여성을 적대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악셀 호네트와 낸시 프레이저 같은 학자들은 젠더 문제의 해결책으로 페미니즘과 같은 정체성 정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문화적 인정투쟁이 경제적 재분배를 대체할 수 없으며, 젠더 관계에 대한 비판과 재구성은 양자를 함께 고려하는 가운데 마련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후’ 또는 ‘그 후’를 출발점으로 삼은 〈헬페미니스트 선언-그날 이후의 페미니즘〉과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은 기질과 방법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가부장제에 고착되지 않는 ‘변이체/비체’들의 공감과 연대라는 공동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