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밥 로스라는 인물을 어떻게 처음 알게 되었는가는 제각각 다르지만 이 사람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부분들은 비슷하다. 둥근 아프로헤어(아프리카 스타일의 곱슬머리)에 미소 짓는 얼굴, 편안한 말투로 늘어놓는 신변 잡담과 우스갯소리,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한마디가 있다. “참 쉽죠?”

밥 로스의 이 말을 두고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밥 로스의 그림 기법은 기술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 흰 캔버스 위에 밑그림 없이 바로 칠하기 때문에 힘들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유화 물감이 마르기 전에 덧칠을 해서 완성하는 방식이라 전체 과정이 길지 않다. 그림을 한 번도 그려보지 않은 사람도 몇 번 따라 해보면 웬만큼은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 때문에 밥 로스의 그림들은 정통 회화를 전공했거나 미술 공부를 한 이들에게 썩 좋은 평가를 듣지 못한다. 그가 화제에 오르면 상당수의 미술 전공자들은 한결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건 그냥 이발소 그림이야.” “예술적 가치가 전혀 없어.” “아무나 막 그린다고 다 미술인가?”

‘그림은 아무나 그리는 게 아니다.’ 예전에는 미술을 시작하려면 반드시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밥 로스가 나타나기 전에도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어느 정도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고 재능이 있어도 학원에 다니거나 취미 강습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는 기본 원리와 기법을 배운 후에 취미 생활을 영위하는 게 정석으로 여겨졌다.

ⓒ이우일 그림

밥 로스는 그런 대중에게 그림은 혼자 그릴 수 있고, 붓만 들 수 있으면 누구나 쉽게 그 방법을 습득하는 게 가능하다고 얘기해주었다. 밥 로스가 ‘웨트 온 웨트(Wet on Wet)’라고 이름을 붙인 기법은 그가 최초로 개발한 회화 기술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좋아서 하는 일에 전문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누구보다 가장 먼저 던진 이가 밥 로스였다. ‘웨트 온 웨트’는 촌스러운 화풍으로 보이지만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회화 기법이고, 미술은 어렵고 배운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장 널리 퍼뜨린 방법이기도 하다. 


일본에 ‘유루오타’라는 표현이 있다. 직역하자면 ‘느긋한 오타쿠’라는 뜻인데, 좋아하는 것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외부와 단절되어버린 기존 오타쿠들에 대한 반발로, 깊이 좋아하기보다는 가볍게 ‘덕질’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신조어이다.

내 삶을 ‘울트라 마린에 티타늄 화이트를 섞은 것’처럼 채색한다면

요즘 사람들은 밥 로스를 잘 모른다. 하지만 그의 언행을 담은 ‘짤방’이나 개그 만화, 코미디 방송을 보면 박장대소한다. EBS에서 방영한 〈그림을 그립시다〉를 본 적은 없어도, 무엇을 바탕으로 한 우스갯소리인지 알고 있다. 밥 로스의 그림과 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고인이 된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이렇게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모두가 밥 로스의 ‘유루오타’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자신을 화가로서보다는 재미있는 유행어를 남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면 밥 로스는 뭐라고 할까? 아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즐거워할 일을 찾았다니 정말 기쁘네요. 무언가를 좋아할 때 꼭 전문적으로 배우거나 알아야 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그걸 좋아한다는 것, 그게 바로 가장 중요한 겁니다.”

삶이 나를 힘들고 지치게 한다면 밥 로스의 말대로 가볍게 좋아할 만한 뭔가를 찾아보면 어떨까. 본격적으로 애정하지 않는다고 누군가가 타박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게 내 삶을 ‘울트라 마린에 티타늄 화이트를 섞은 것’처럼 좀 더 밝고 아름답게 채색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자, 잠깐 걷는 속도를 늦춰서 주위를 둘러보며 당신의 13호 유화 붓을 찾아보자. “어때요? 참 쉽죠?” 1995년 7월4일 밥 로스는 좋아하는 ‘반다이크 브라운’을 챙겨들고 천국으로 향했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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