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메르스 환자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보건 당국은 2013년부터 메르스 대책반을 운영했고, 이듬해 대응지침도 만들었다. 2년에 걸친 준비는 허무하게 뚫렸다. 매뉴얼을 보고서야 이유를 알았다. 실제로 환자가 발생할 것을 가정하지 않은 매뉴얼이었다. 일선 의원과 중소 병원에서 환자 경험을 묻지 않는 현실도, 메르스 발생국을 거쳐 다른 나라에서 입국할 가능성도 매뉴얼은 상정하지 않았다. 병원 내 감염에 취약한 의료 시스템은 고려되지도 않았다. 매뉴얼이 놓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뒷북 개정’이 뒤따랐다.

ⓒ시사IN 양한모

코레일 외주 승무원의 비상시 매뉴얼은 있던 내용을 없앤 경우다. 2004년 KTX 개통 직후 매뉴얼에는 외주 승무원(여승무원)이 담당해야 할 안전 업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몇 년 만에 매뉴얼은 극적으로 단순해졌다. KTX에 불이 나도 소화기로 끄는 것은 코레일 열차팀장 몫이다. 열차 충돌·탈선, 독가스 살포 등 모든 비상 상황에서 외주 승무원 업무는 ‘안내방송’과 ‘환승 시 승객 안전에 유의’가 전부다. 원청인 코레일이 외주 승무원에게 지시하면 불법 파견이 되기에 벌어진 일이다. 외주라는 고용 형태가 문제가 되자, 회사는 고용 형태가 아니라 안전 매뉴얼을 바꿔버렸다. 2013년 대구역 충돌·탈선 사고 이후 외주 승무원도 안전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협조’다. 2015년 대법원은 외주 승무원이 이례적 상황에는 안전 업무를 하지만, 안전이 외주 승무원 업무는 아니라며 해고된 KTX 여승무원들이 코레일 노동자가 아니라고 했다.


매뉴얼이 모든 상황을 완벽히 대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매뉴얼의 변천사를 짚다 보면 한국 사회의 민낯과 만나게 된다.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없는 셈치는 어떤 태도 말이다. 감염병 발생을 가정해 병원 내 감염을 구조적으로 막는 데에도, 외주 승무원을 직접 고용해 안전을 담당하게 하는 데에도 결국 돈이 든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만에 하나’에 대비하는 일과, 시간과 비용을 아끼고 위험을 감수하는 일 중에서 이 공동체는 거의 늘 후자를 택했다.

오준호 작가의 책 〈세월호를 기록하다〉에는 ‘후자’를 택해온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침몰 원인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만큼이나, 우리 공동체가 일련의 지속 가능하지 않은 비용 절감을 어디까지 용인할지 이야기하는 일도 중요하다. 덜어낸 비용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위험으로 돌아온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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