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공공부문의 ‘블라인드 채용’ 의무화 방침을 밝힌 지 한 달이 지난 7월18일, 공기업 대비반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의 한 취업 학원을 찾았다. 학원 관계자는 기자에게 자기소개서와 면접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블라인드 채용으로 직무를 중시한다지만 행정 관련 경력은 거기서 거기다. 결국은 자기소개서와 면접, 이 두 가지로 어필하는 수밖에 없다.” 이 관계자는 정부의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와 블라인드 채용 확산 정책으로 면접 대비반을 찾는 취업준비생의 수요가 늘었다고 귀띔했다.

지난 6월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공공부문의 블라인드 채용을 지시했다. 블라인드 채용은 전형 과정에서 편견이 개입될 수 있는 출신지·가족관계·학력 같은 항목을 지우고 직무 관련성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채용 방식을 뜻한다. 당장 7월부터 공공기관과 지방 공기업은 채용 시 입사지원서에 출신지역·가족관계·신체조건·학력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할 수 없다. 단, 직무를 수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경우는 예외다. 332개 공공기관은 7월부터, 149개 지방공기업은 인사 담당자 교육을 거친 후 8월부터 시행한다.

정부가 발표한 공공기관 입사지원서 예시(안).

공공부문의 블라인드 채용 강화 방침이 느닷없는 일은 아니다. 2005년 공무원 시험부터 응시 원서에 학력란이 폐지되었고 블라인드 면접이 도입됐다. 2007년에는 공공기관 전형 과정에서 성별·신체조건·학력에 대한 제한을 없앴고, 2015년부터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을 도입해 직무 중심 평가를 추진했다. 이번에 권고 수준에 그쳤던 걸 의무화하고 전 공공부문으로 확대 시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민간 기업들의 블라인드 채용 선언도 이어졌다. 이미 SK그룹은 일부 전형이긴 하지만 자기소개서로만 서류 심사를 보는 ‘바이킹 챌린지’ 제도를 운영해왔다. GS리테일도 올해부터 서류 심사와 1차 면접에서 지원자의 학력을 보지 않기로 했다. 제약회사인 동아쏘시오홀딩스가 50년 이상 유지해온 입사지원서 양식을 수정해 학력·사진·출신지역 등의 사항을 뺐다. 


문재인 정부는 민간 기업으로 블라인드 채용을 더 확산시키기 위해 지원책을 고심 중이다. 블라인드 채용 가이드북 제작과 채용 관련 컨설팅을 고려하는 한편 고용노동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블라인드 채용 확산 추진단’도 꾸린다. ‘채용 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도 추진 중이다. 채용 과정에서 요구하는 기초 심사 자료에 신체조건, 가족사항, 출신지역, 재산, 종교, 혼인 여부 등에 관한 정보 기재를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블라인드 정책’은 다른 영역으로도 확대되리라 보인다.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따르면 대학 입시에서도 출신 고등학교를 밝히지 않는 블라인드 면접이 도입되고 로스쿨 신입생을 뽑을 때도 블라인드 기준을 적용하기로 했다.

아직도 94.7% 기업에서 출신 학교 물어

정부 방침에도 불구하고 채용 과정에서 이력서에 학력 기재를 요구하는 회사는 여전히 대다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3567개 회사의 이력서 항목을 조사한 결과 출신 학교를 묻는 항목이 94.7%로 나이(98.5%)에 이어 가장 많았다. 출신 대학을 비롯해 분교 여부, 소재지, 주·야간 여부, 편입 여부를 묻는 곳도 있다. 명문대 졸업자가 비명문대 졸업자보다 첫 직장에서 임금을 더 받고 첫 일자리가 대기업 정규직일 가능성이 높은 점 등, 학벌은 노동시장 내에서 더 높은 성과를 거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대학 학벌이 대졸자의 첫 취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 김성훈, 2014, 교육과학연구).

ⓒ연합뉴스7월14일 국가공무원 9급 공개경쟁 채용 필기시험 합격자들이 면접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블라인드 항목에 포함된 ‘학력’을 두고 구직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었다. 채용 과정에서 출신 학교를 참고하는 게 ‘차별’인지 의견이 엇갈린 것이다. 학벌 사회의 공고함을 깨고 기회의 평등을 꾀할 수 있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환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학력은 지원자가 그간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보여주는 공정한 지표라며 반대하는 이도 있다. 특히 이른바 ‘상위권’ 대학에 다니는 학생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외국어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의 사립대에 다니고 있다고 밝힌 한 대학생은 자신의 학교 인터넷 커뮤니티에 ‘외고·자사고 폐지, 학벌 블라인드제, 지역할당제까지 내 목을 조여오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보면서 나 스스로가 이 정부에 적폐임을 깨달았다’라는 글을 올렸다. 일부 학생들은 이력서의 주소 칸에 기숙사명을 적거나 연락처에 대학 이름이 포함된 이메일을 적자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학교뿐만 아니라 성별도 블라인드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비롯해 어차피 서류만 블라인드일 뿐, 면접 과정에서 학력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무용론’도 나온다. 학벌 대신 다른 평가 기준(스펙)을 요구해 취업준비생의 부담이 오히려 늘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관련 기사 30~32쪽).


실제 채용을 담당하는 기업 인사 담당자들의 의견도 엇갈렸다. 한 제조업체 인사 담당자는 “학력이 성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될 수 있겠지만 창의성 측면에서 현대에 맞는 채용 기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한 건설업체 인사 담당자는 “사람을 단기간에 평가할 때 학력이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직접적인 요소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인 평가 기준이 되는데 무작정 가리면 채용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2년, 채용 과정의 차별 예방 지침을 다룬 〈평등·합격, 차별·탈락〉에서 ‘지방대 출신에 대한 차별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학교명, 학교 소재지 기재 등이 사라져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블라인드 채용에 거는 기대 중엔 지역 청년에 대한 차별 감소 효과도 있다. 한국방송공사(KBS)의 경우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했던 2003년부터 2007년 사이 명문대 출신 입사자가 70%에서 30%로 줄었고 지방대 출신이 10%에서 31%로 늘었다. 전북 완주에 위치한 한국전기안전공사의 경우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후 비수도권 대학 출신 비율이 32.1%에서 46.7%로 늘었다. 정부가 꾸린 ‘블라인드 채용 확산 추진단’에서 자문을 맡고 있는 한양대 이상민 교수(경영학부)는 “일부 개인에게는 역차별로 보일 수 있지만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을 꾀하고 수도권의 과밀화 문제를 극복해보자는 큰 지향점이 있다. 보완할 점이 있지만 큰 차원에서 사회적인 정당성을 가진 정책이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블라인드 채용과 함께 ‘지역인재 채용 할당제(할당제)’를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역으로 이전된 공공기관이 신규 채용을 할 때 적어도 30% 이상은 지역 인재를 채용하도록 하라는 문 대통령의 지시 이후 국토교통부가 할당제 의무화를 검토 중이다. 이 경우 관련법에 따르면 대상자를 해당 지역 대학 출신으로 제한하고 있어, 지역에서 초·중·고교를 나오고 대학만 서울 수도권으로 진학한 학생들로부터 역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상민 교수는 “아직 완벽하지 않고 관련 논의들이 진행 중이다. 무엇이 차별이고 차이인지 앞으로 공감대를 만들어나가는 게 또 다른 과제다”라고 말했다.

아직까진 블라인드 채용 강화라는 선언만 있을 뿐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없다. 취업 관련 커뮤니티에는 공기업 시험을 준비하는 취업준비생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취업 포털 사이트 〈인크루트〉 관계자는 “구체적인 내용보다 제도의 기본적인 사항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 같다. 가령 입사지원서에 기재하면 안 되는 항목이 무엇인지, 정규직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건지, 필기와 면접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이 주된 문의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취재 도움 ·최진렬 〈시사IN〉 교육생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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