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당 문고’라는 게 있었다. 작가 장정일이 ‘열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라고 했던 작은 문고판 책이다. 호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큼 작고 가볍고, 값쌌다. ‘접근성’이 좋았던 만큼 주머니가 가벼운 중고생에게 인기였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데미안〉도 삼중당 문고로 읽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아류 문고집이 등장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온갖 정보가 나온다는 인터넷 위키백과에도 한 줄 나오지 않는, 잊힌 책이다.

이런 ‘작은 책’이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 삼중당 문고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세계문학전집류도 적지 않지만, 단순히 ‘복고’라고 칭하기에는 형식과 내용에서 사뭇 달라졌다. 과거 문고판 시리즈가 박리다매로 보편적 다수에게 접근했다면, 요즘 작은 책은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특별한 독자에게 다가간다. ‘콘텐츠 우려먹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던 과거 문고판과 달리 요즘 작은 책은 ‘새로운 상품’을 생산했다는 평을 듣는다.

ⓒ시사IN 신선영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진열되어 있는 ‘작은 책’들.

창작과비평사(창비)는 최근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를 펴냈다. 가로 122㎜, 세로 188㎜ 사이즈로, 그야말로 손바닥만 하다. 100쪽 이내 짧은 분량에 여러 컷의 일러스트까지 더해 천천히 읽어도 1시간 안에 한 권을 독파할 수 있다. 공선옥·성석제·김중미·배명훈·정소연 등 중량감 있는 작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창비는 이 시리즈 출간작을 더욱 늘려나갈 예정이다. 문학과 멀어져가는 청소년에게 ‘동화책에서 소설로 가는 가교’를 만들어주기 위해 현직 교사들이 직접 작품을 선정했다. 정가는 7500원이다.


민음사는 작년부터 ‘쏜살문고’라는 이름의 작은 책을 펴내고 있다. 무라카미 류, 어니스트 헤밍웨이, 김승옥 등 국내외 작가의 작품 가운데  작고 가볍게 펴낼 만한 것들을 선별했다. 전문 디자이너에게 맡긴 표지를 내세워 고색창연함도 덜어냈다. 작은 판형에 책값은 5800~9800원 선이다. 25권 작품이 모두 2쇄 이상 찍는 성과를 올렸다.

마음산책 출판사는 ‘마음산문고’라는 이름의 작은 책을 선보였다. 올해 초 첫 시리즈로 일본 작가 요네하라 마리의 에세이집 5권을 펴낸 데 이어 이해인 수녀의 작품집도 내놓았다. 파스텔톤 색조를 도입한 산뜻한 표지가 독자들에게 어필하면서 요네하라 마리 에세이의 경우 초판 600세트가 순식간에 팔렸다.

작은 책은 ‘작은 출판사’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전 직원이 3명에 불과하지만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동사의 맛〉 등을 히트시키며 작은 출판사의 모범 사례로 자리 잡은 유유 출판사는 재작년부터 ‘땅콩문고’라는 이름의 작은 책을 선보였다. 〈책 먹는 법〉 〈서평 쓰는 법〉 〈박물관 보는 법〉 따위가 그것이다. 200쪽 안팎 분량에 가로 폭을 115~125㎜ 크기로 줄여 정가 9000원에 내놓았다. 무엇보다 책날개를 없앴다. 날개를 없애면 표지 하나 만들 종이로 2개를 만들 수 있어 제작비가 줄어든다.

동네 서점과 손잡은 출판사들

작은 책 열풍은 이미 몇 해 전부터 감지되었다. 재작년과 작년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은 〈한국이 싫어서〉와 〈82년생 김지영〉이 기실 200쪽 안팎의 작고 아담한 판형이었다. 은행나무 출판사 역시 ‘노벨라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2014년부터 100~200쪽 분량의 ‘작은 소설책’을 펴내고 있다. 배명훈의 〈가마틀 스타일〉, 윤이형의 〈개인적 기억〉 등 13권이 노벨라 시리즈로 나왔다.

동네 서점에도 작은 책은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민음사의 쏜살문고는 7월부터 신선한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이른바 ‘쏜살문고 동네 서점 프로젝트’다. 쏜살문고 가운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오직 동네 서점에서만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 서점에서는 구입할 수 없는 ‘동네 서점 한정판’이다. 

ⓒ민음사 제공민음사는 지난해부터 ‘쏜살문고’라는 이름의 작은 책을 펴내고 있다.

출판사와 동네 서점이 손을 잡자는 아이디어는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가 내놓았다. 말로는 동네 서점을 살리자면서도 정작 각종 이벤트는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 위주로 이루어지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이후 서울 노원구의 서점 ‘51페이지’ 김종원 대표가 실무를 맡으면서 일이 착착 진행됐다. 장 대표는 “책이 팔리지 않더라도 동네 서점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되도록 단가를 낮춘 책을 골라야 했다. 그런 점에서 쏜살문고 같은 작은 책이 맞춤했다”라고 말했다.


서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강원도부터 제주도까지 전국 126군데 서점이 쏜살문고 동네 서점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진주문고, 청주 책이있는글터, 군산 한길문고, 춘천 광장서적, 속초 동아서적, 일산 한양문고, 서울 불광문고 등 지역 대표 서점들과 책방이음, 달팽이책방, 동네 책방 숨, 개똥이네, 풀무질, 최인아책방, 봄날의책방, 소심한책방 등 전국 곳곳의 독립 서점이 함께한다. 장 대표는 “동네 서점도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는 기운을 불어넣어줬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작은 책 출간 붐에도 효시가 있을까? 한국 문학에 관한 한 출판계에서 가장 효시에 가깝다고 이야기하는 대상이 있다. 작가정신 출판사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기획한 ‘소설향’ 시리즈다. 당시 외환위기로 독자는 책을 살 돈이 없고, 출판사는 종이값 등 제작비가 올라 책을 낼 여력이 없을 때였다. 작가정신은 원고지 300~400장 분량의 중편소설을 5000원에 팔았다. 이윤기·배수아·윤대녕 등이 소설향 시리즈로 신작을 발표했다. 이후 1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23권까지 출간된 소설향 시리즈는 2006년 이후 더 이상 책을 내지 않았다.

그 후 11년. 작가정신 출판사는 최근 ‘소설향’ 시리즈 특별판을 펴냈다. 최윤의 〈숲속의 빈터〉,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 등 대표작이라 할 만한 5권을 다시 추렸다. 김종숙 작가정신 편집장은 “사람들은 이제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소설을 읽는다. 그런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소설향 시리즈를 다시 펴냈다”라고 말했다. 김 편집장은 그러면서 흥미로운 자료 하나를 보여주었다. 1998년 소설향 시리즈가 처음 만들어질 때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이윤기씨가 스스로 쓴 ‘추천사’다. 다소 길지만 옮겨본다.

“문자 문화의 꽃에 대한 일본 편집자들의 전망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즉 ‘읽는 책에서 보는 책으로 바뀌리라는 전망’ ‘고급화하리라는 전망’ ‘소형화하면서 핸디해지리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이러한 전망은 지금까지 출간된 책에 대한 상식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정신’이 펴내는 소설향 시리즈는 이러한 ‘고급화’와 ‘소형화’의 전망에 맞아떨어지는 기획이다.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단막극을 보는 듯한 중편소설이 많이 나와서 이 시리즈가 지속적으로 출간되길 기대한다.”

과거 자료임을 모르고 보면 지금 봇물처럼 쏟아지는 작은 책들의 권두언으로도 맞춤하다. 그러니까, 19년 전 출판계 일각에서 시작됐던 치열한 고민의 한 축이 이제 꽃을 피우는 셈이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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