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제임스 매커보이)는 가까스로 바닷가에 도착했다. 부대에서 떨어져 나와 한참을 헤매다 기적처럼 다다른 해변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와 귀향의 설렘이 공존하는 수십만 명의 얼굴 사이로 로비의 얼굴이 더해졌다. 패잔병으로 가득 찬 모래사장을 따라 갈팡질팡 로비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영화 〈어톤먼트〉(2007)에서 가장 극찬을 받은 명장면. 한 번에 이어 찍은 5분짜리 롱테이크로 재현한 그 해변이 바로 됭케르크다.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 땅을 마주 보는 프랑스 해안. 독일군에 포위된 연합군 40만명이 몰살 위기에 처한 그곳에서 ‘사상 최대의 구출 작전’이 결행되었다. 1940년 5월26일부터 6월4일까지 열흘 동안 영국으로 실어 나른 병사의 수가 자그마치 33만8226명. 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뒤바꾼 일명 ‘됭케르크의 기적’에서 로비의 여정은 끝이 난다. 곧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 붙들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40만명 가운데 그도 있었다.

해변의 1주일, 바다의 하루, 하늘의 1시간


〈어톤먼트〉의 이야기가 끝난 바로 그 자리에서 영화 〈덩케르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톤먼트〉가 개봉할 때만 해도 프랑스식 발음 ‘됭케르크’로 자막에 등장한 해안이, 영국식 발음에 가까운 ‘덩케르크’로 바뀌어 10년 만에 다시 관객 앞에 펼쳐진다. 그리하여 첫 장면.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 골목을 내달리는 앳된 얼굴의 영국 병사 토미(핀 화이트헤드). 높은 담장을 넘자마자 갑자기 해변이 나타난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바다를 보며 서 있다. 무기력한 침묵. 무질서한 기다림. 갈팡질팡 로비가 걷던 그 모래사장 위를 이제 터덜터덜 토미가 걷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놀라운 스토리텔링이 시작된다. 〈덩케르크〉에는 모두 세 개의 공간과 세 개의 시간이 공존한다. 먼저 해변의 일주일. 필사적으로 배를 찾아 오르지만 채 바다로 나가기도 전에 가라앉고 뒤집히고 폭발하는 일주일을 그린다. 바로 토미의 시간이다.

그리고 바다 위 하루. 덩치 큰 군함이 접근하기 힘든 해안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민간 선박 수백 척이 있었다. 그중 한 척이 바다에 빠진 병사들을 건져 올리는 한나절의 사투가 담긴다. 도슨 선장(마크 라이언스)의 시간이다. 끝으로 하늘에서의 한 시간. 적의 폭격기를 격추하려 고군분투하는 스핏파이어 전투기의 긴박한 비행을 재현한다. 조종사 파리어(톰 하디)의 시간이다. 이 세 개의 공간과 세 개의 시간을 넘나들며 하나로 뒤섞이는 이야기는 실로 경이롭다.

말하자면 〈덩케르크〉의 이야기는 ‘해변의 일주일’ ‘바다 위 하루’ 그리고 ‘하늘에서의 1시간’이 각각 x축, y축, z축으로 뻗어나가며 만들어낸 거대한 입체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구현한 최대치의 시각적 쾌감, 한스 짐머의 음악과 어우러진 극강의 사운드 디자인, 그리고 실제 덩케르크 해변 위에 CG를 거의 쓰지 않고 일일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집요한 디테일이 또한 x축, y축, z축으로 뻗어나가 창조한 새로운 차원의 영화 예술이다.

대사를 줄이고 신파를 없애고 악당을 삭제한 전쟁 영화. 오직 ‘살기’ 위해서, 오직 ‘살리기’ 위해서 벌이는 개개인의 처절한 전투만이 그저 숭고하고 엄숙하게 그려지는 생존 드라마. 모든 면에서 위대한 이 영화의 가장 위대한 점은 상영 시간이 106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군더더기를 매달고서 너무 쉽게 2시간을 넘기는 영화들에 지쳐가던 나는,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온몸으로 체험한 〈덩케르크〉의 단단한 106분이 한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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